[중앙시평] 자유투표제와 정당정치 오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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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몇년 전 이웃 일본에서 의원들의 자유투표를 둘러싸고 웃지 못할 민주주의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논쟁은 깨나 알려진 보수 우파의 한 논객이 "개인적 신념에 따른 소신 투표의 자유가 영국보다 훨씬 많은 일본의 정당정치가 영국의 정당정치보다 한결 더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 이라는 웃지 못할 주장을 펴면서 시작됐다.

물론 논쟁은 이 논객의 정당정치에 대한 무지 내지 오해 문제로 결론이 났지만,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신인들 중심의 자유투표제 움직임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것 같다.

중진 의원들의 냉소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정치신인들의 자유투표 움직임은 선거에서 나타난 민의의 요구라는 점에서 무시할 수 없는 정치운동으로 등장하고 있는 듯하다.

여야 총무들이 다같이 원칙적 수용의사를 밝히고 나섰는가 하면, 일부 정치학자와 변호사들은 이론적인 지원사격까지 펼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한 신진 정치학자는 자유투표제를 통해 앞으로의 의회정치가 당 중심이 아닌 퓻?중심으로 펼쳐져야 한다고 역설하고 나서기까지 했다.

정당보다 의원 개인 중심의 정치가 의회정치 내실화의 첩경으로 주장되고 있는 것이다.

정말 일본에서 있었던 논쟁 못지않게 웃지 못할 정당정치에 대한 무지 내지 오해에서 빚어진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자유투표제는 우리에게 있어 그렇게 절박한 것이며, 또 그것은 한국 의회정치의 보다 내실있는 민주화와 개방화 그리고 자유화를 위해 기여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자유투표제는 그렇게 절박하지도 않으며 또 적극적으로 도입돼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의회 민주주의는 정당 정치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정당정치는 학교교실에서 이뤄지는 투표행위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학교교실에서는 각자의 소신에 따른 투표행위가 민주주의적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의회정치는 국민 개개인의 직접투표 대신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이 간접적으로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는 정치제도다.

이 때문에 국민의 의사를 대변할 국회의원 선거전은 당의 공약을 둘러싼 표의 획득전에 다름아니다.

따라서 만일 당선된 국회의원이 당의 공약을 무시하고 자신의 신념대로 투표한다면 그것은 유권자와의 약속 위반인 동시에 지극히 비민주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다.

두번째로 보스정당 체질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서의 자유투표제는 헤게모니 세력에 의한 직접민주주의에의 유혹을 증대할 뿐만 아니라 파벌정치의 구조화를 초래할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보스정치에 대한 대안은 직접민주주의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투표제를 적극 도입할 경우 권력집단에 의한 야당의원 매수와 '사쿠라' 정치는 피할 수 없는 현상이 될 것이다.

반대로 자유투표제가 지나치게 활성화하면 그것은 정당정치가 아니라 조선시대 파벌정치의 재판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의회정치는 정당을 축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파벌을 중심으로 이뤄지게 될 것이다.

세번째로 자유투표제는 이권 쟁탈과 배분의 정치를 심화할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16대 총선은 한국정치의 고질적 병폐인 무이념.무정책 선거의 문제점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자유투표제는 이러한 문제점을 더욱 악화할 가능성이 크다.

정당을 국가적 공약이 아닌 지역구에 대한 개인적 선심공약의 집합체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결과는 국익을 제쳐둔 극심한 이권 쟁탈과 배분의 정치일 뿐이다.

그러나 지금 자유투표제의 수용은 피할 수 없는 대세인 듯 싶다.

문제는 어떻게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우(愚)를 범하지 않고 정당민주화와 정당정치 활성화를 이룰 것인가에 있다.

자유투표제는 보스중심의 정치적 지배구조에 대한 국민적 저항감을 의식하는 제스처 정도로 그쳐야 한다.

장달중 <서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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