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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병욱칼럼] 국회가 정치의 중심 돼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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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야당의 '과반 미달의 승리' 로 끝난 16대 총선 결과는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하라는 국민의 명령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야도 발 빠르게 영수회담을 하고 정책협의회를 구성하는 등 이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변화된 겉 모습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의 뿌리깊은 불신과 경계심은 아직 여전한 것 같다.

어차피 앞으로 정치는 차기 대권창출과 현 대통령 임기중 원만한 국정운영이란 두 목표를 축으로 움직이게 돼 있다.

정권 교체가 중심 목표일 수밖에 없는 야당과 가급적 두 가지 목표를 다 이루려는 여당 간에는 접점이 크지 않다.

여야 협력에 기본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바탕이다.

여기에 서로간의 깊은 경계심과 불신이 다시 고개를 들면 지금의 협력분위기는 언제라도 깨질지 모를 취약성을 지니고 있다.

벌써부터 대통령의 자민련을 비롯한 소수당 대표 연쇄회담에 대해 한나라당쪽에선 불신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총선 결과를 무시하고 소수당들과 무소속을 묶어 한나라당을 포위하려는 다수파공작이 아니냐는 것이다.

원만한 국정운영을 위해 소수당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대통령의 행보를 야당은 여야 영수회담을 격하시키려는 의도로 의심한다.

이렇게 상호 신뢰기반이 굳어지지 않은 상황에선 민주정치 원칙과 명분에 충실한 것 이상 좋은 방책이 없다.

국회가 정치의 중심이 되고, 여야 대화와 다수결 원칙을 확립하는 것이다.

현행 헌법은 유신.5공 시절의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을 삭제함으로써 대통령 권한을 줄이고 국회 권한을 늘렸다.

그러나 여대(與大)하의 국회는 여전히 대통령의 통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국회의장도 대통령이 임명하다시피 해 왔다.

16대 국회 원(院)구성 협상에서도 여당은 전례대로 국회의장을 여당에서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소야대였던 1988년 13대 국회 원구성때 야당이 양보했던 선례까지 내세우고 있다.

여야가 합의한다면 못 할 일도 아니지만 그런 주장은 민주정치 원칙과는 거리가 있다.

국회의 자결권에 따라 국회 인사는 국회에서 다수결로 정할 일이지 그 소속이 여당이냐 야당이냐가 요건일 수는 없다.

과거 의장이 줄곧 여당 쪽에서 나왔던 것은 여당이 다수당이었기 때문이다.

13대 국회때 여소야대 상황에서 여야 합의로 여당에서 의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당시 민정당은 과반수에는 미달했어도 엄연히 원내 제1당이었다.

지금과는 상황이 달랐다.

소수당이라도 여당이니까 국회의장을 차지해야 한다는 논리는 국회의 정부 예속을 제도화하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 여당이 국회의장을 차지하려면 소수당들과 무소속 의원을 설득해 국회 표결에서 다수지지를 얻으면 된다.

2년 전 야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한 상황에서도 여권이 의장선거에서 이기지 않았는가.

20인 이상으로 돼 있는 국회법 제33조의 교섭단체 구성요건을 완화하는 문제도 그렇다.

'20인 이상' 이란 요건이 만고불역(萬古不易)의 원리도 아니고 외국의 경우 그보다 훨씬 낮은 기준을 적용하는 경우도 많다.

유신 전에는 우리나라도 '10인이상' 이었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소수의 의견을 존중해야 할 필요도 커졌고, 의원 정수가 줄었으니 교섭단체 요건을 그에 맞춰 완화하자는 얘기도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

문제는 지금의 논의가 이런 차원이 아니라 17석밖에 못 얻은 자민련을 봐주자는 발상에서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위인설관 비슷한 '위당개법(爲黨改法)' 이라고나 할까. 특정인이나 특정정당을 봐주기 위해 자리를 만들고 제도를 고친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자민련은 지금 당장 법을 고치려 하기보다는 우선 타 소수당 및 무소속 의원들과 함께 느슨한 교섭단체를 구성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 정도(正道)다.

교섭단체 요건 완화는 소수의 의견을 의정에 보다 효율적으로 반영한다는 차원에서 1인2투표제 재검토.선거운동의 공평성 확보.전국구 배분요건 완화 등 선거제도 개혁과 함께 논의돼야 할 일이다.

이젠 정치도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전환을 해야 한다.

권위주의의 찌꺼기를 걷어내고 민주주의.의회주의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그래야 신뢰의 뿌리가 깊지 않은 상황에서도 정치가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성병욱 <본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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