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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풍류탑골 (18)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18.살아남은 자의 슬픔

1980년대 말 이승철 시인이나 박철.박영근.김형수.박선욱 등등의 젊은 시인들은 모두 비슷한 처지였다.

각각 상황은 달랐지만 처해 있는 상황은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하는 순간 피를 나눈 동기처럼 금방 정들 수밖에 없을 만큼 불우하기 그지없었다.

이승철 시인의 경우 광주 5.18의 희생자라 할 수 있었는데 그렇다고 무슨 부상을 당했거나 잡혀들어가 옥살이를 한 것은 아니었다.

대학에 다니던 중에 5.18을 만났지만 항쟁기간에는 총을 들었다 놨다할 정도로 심약한 문학청년이었다.

광주 농성동과 대인동 일대에서 그 자신은 죽음의 고비를 넘겼지만 동료들이 끌려가고 부상당하고 무고한 시민들이 학살당하는 참상을 목격했기에 살아남은 자로서의 채무의식을 천형처럼 지니고 살았다고 했다.

그런 모습은 동료들과의 싸움이나 통곡 등 여러 가지로 표출되었고 가끔 노래 부르는 모습으로도 드러났다.

이승철 시인이 잘 부르던 노래는 광주항쟁 때 희생당한 박관현 열사와 이귀순 열사의 영혼결혼식에서 불려진 노래였는데 부를 때면 한 마리 어미 곰이 잃어버린 새끼를 그리워하며 자기 가슴을 치는 모습과 흡사했다.

"음 사람들은 잊지 못하지, 거리마다 넘치던 그 목소리 음 우리들은 잊지 못하지, 밝아오던 마지막 새벽 하늘. 젊은 넋은 애달프고 안타까와도…"

특히 그 다음 구절 '남과 북이 하나 되듯 둘이서 하나되어' 할 때쯤이면 두 볼 위로 눈물이 어룽대곤 했는데 그것은 듣는 사람에게도 벅찬 감격이었다.

광주항쟁 이후 그야말로 우연히 살아남은 친구들과 '젊은 벗들' 이라는 시낭송회를 조직하여 '그날' 의 서러운 시절을 노래하다가 83년 홀연히 서울에 나타나 여러 출판사를 전전하면서도 조금 편해질라치면 광주의 넋들에게 송구스러워 모든 것을 팽개치고 일부러 역경의 길만 가고 있었으니 그러한 서러움이 듣는 이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또한 바로 그러한 이유로 다른 사람의 조그만 마음의 여유도 용서할 수 없는 추악한 짓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탑골에서 행사 후 뒷풀이를 하던 때였는데 이승철 시인이 김정환 시인의 멱살을 잡은 것이다. 뒷풀이 도중 누군가 노래를 부르자 김정환 시인도 특유의 미성으로 '제비' 를 부르고 있었는데 이승철 시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김정환 시인에게 갑자기 다가가서 돌연한 행동을 하였던 것이다.

일행은 뭔지 몰라 아우성이 벌어졌는데 갑자기 이승철 시인이 울부짖었다.

"야, 너 김정환! 문학운동 한다는 자가 광주에서 그토록 사람들이 많이 희생되었는데 '아 정답던 얘기…' 라니 그토록 한가하고 여유로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거야 엉.그러면서도 광주를 팔아 명망을 얻으면 다 되는 거야."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여흥의 자리에서 가슴을 적시는 노래조차도 이승철 시인에게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였다.

여러 사람이 말리고 나중에는 누군가의 주먹다짐이 있고 난 뒤에야 종결된 그 일은 내게 너무나 낯설었다.

사실 그러한 주관적인 태도는 주위 사람들에게 충분히 이해 받지 못했고 그럴수록 이른바 '자학' 은 심했던 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편할 리 없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

생각해보면 그들 모두는 시인이라는 이름 하나만 가슴에 붙이고 그 시절을 통과하던 막무가내의 청춘이었으며 세상의 불의나 부정엔 조금이라도 정면으로 돌파해가지 않는 문학운동은 무조건 인정할 수 없는 죄에 해당되었던 것이다.

한복희<전 탑골주점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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