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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복권운동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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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호 10면

시인 정지용의 아들인 북측 방문단 정구인(中)씨가 2001년 2월 26일 서울 센트럴시티 상봉장에서 남측의 형 구관(左), 여동생 구원씨를 만나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사진 중앙포토

1970년대 막바지 기자는 한 월간지로부터 납·월북 문인들의 6·25전쟁 이전의 문학적 궤적과 전쟁 전후의 행적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해금의 초기단계여서 선뜻 내키지는 않았지만 특히 정지용·김기림에 대해 그때까지 밝혀지지 않은 부분을 밝혀내고 싶은 욕망도 있었다. 백철·조용만 등 납·월북 문인들과 가까웠던 원로 문인들을 만나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도 들었고, 몇몇 공개되지 않은 자료들을 찾아내기도 했다. 취재 과정에서 정지용과 김기림이 북으로 가게 된 경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됐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43>

증언이나 기록, 그리고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김기림은 납치된 것이 확실했으나 정지용은 납북인지 월북인지 쉽게 가닥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백철 등은 정지용의 북행 배경을 ‘친구 따라 강남 가듯’ 혹은 ‘바람이나 쐬듯’이란 표현으로 어떤 명분이나 이유를 찾을 수 없다고 증언했다. 납치됐을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기록도 있기는 했다. 납북됐다 탈출해 4대 국회의원을 지낸 계광순에 따르면 그가 평양 감옥에 수감됐을 때 함께 수감됐던 이광수와 정지용의 모습을 똑똑히 봤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찌어찌 하다가 북으로 가게 된 정지용이 잘못을 깨닫고 다시 남하하려다 붙잡혀 수감됐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내용의 글이 실린 월간지가 발매된 지 며칠 뒤 50세쯤 돼 보이는 낯선 남자가 기자를 찾아왔다. 점퍼 차림에 두툼한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다. 순박해 보였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 있던 그는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빈 회의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정지용 시인의 큰아들 정구관’이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기자가 악수를 청했는데도 그는 애써 외면했다. 오른손 주먹으로 불룩해 보이는 왼쪽 가슴을 툭툭 치며 그가 말했다.

“이게 뭔 줄 아시오? 칼이오, 칼! 내가 이렇게 늘 가슴에 칼을 품고 다닙니다. 우리 아버지가 월북했다는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뜻이오. 난 빌어먹을 연좌제에 얽혀 직장다운 직장 한번 제대로 가져보지 못하고 아버지가 복권될 날만 기다리며 30년을 이렇게 살고 있소. 한데 정 기자는 무슨 근거로 우리 아버지가 월북했다고 쓴 거요?”

‘칼’ 소리에 섬뜩했으나 사실 기자는 ‘월북’이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았다. ‘자진 월북’과 구별하기 위해 ‘북행’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는 ‘월북’과 ‘북행’을 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에 따르면 정지용은 서울이 북한군에 의해 점령되고 며칠 후 그에게서 시를 배운 제자들이라며 찾아온 청년 서너 명에게 어디론가 끌려가 소식이 끊겼다고 한다. 당시 22세였던 정구관은 인민군에 끌려갈 위험성이 커 숨어 지냈으며, 17세였던 둘째 동생 구인이 아버지를 찾아 나섰으나 그 역시 그 뒤 행방이 묘연했다는 것이다.

해명의 이야기가 오간 뒤 굳어있던 표정이 다소 풀린 정구관은 들고 온 대형 봉투의 내용물을 테이블 위에 쏟아냈다. 거기에는 정지용과 관련된 신문과 잡지의 기사 스크랩, 그리고 관계기관과 각계에 보냈다는 정지용 복권을 위한 진정서, 탄원서 따위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아버지 복권운동은 먹고 사는 문제보다도 더 절실했으나 결국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며 정구관의 눈가에 물기가 번졌다. 그는 가져온 자료들을 ‘복사물이니 두고두고 참고하라’며 기자에게 전하고 돌아갔다.

정구관의 그런 눈물겨운 복권운동과는 관계없이 정지용은 88년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면서 다른 월북 문인들과 함께 일괄 해금됐다(그때 유보된 홍명희·이기영·한설야·조영출·백인준 등 5명도 이듬해인 89년 2월 모두 해금됐다). 정구관은 곧바로 ‘지용기념사업회’를 만들어 그 이사장으로 아버지를 위한 여러 가지 사업을 이끌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나가고 / 얼룩백이 황소가…’로 시작되는 정지용의 시 ‘향수’는 이동원·박인수가 노래로 불러 89년 10월 3일 호암아트홀에서 첫선을 보인 뒤 곧 국민적인 애창곡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2001년 제3차 남북이산가족 상봉 때 정구관은 생사를 모르던 둘째 동생 구인을 만날 수 있었다. 정구관은 북한에서의 아버지의 행적을 물었으나 동생은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결국 북행 이후 정지용의 행적은 영원히 베일에 싸이게 된 셈이다. 정구관은 2004년 76세를 일기로 평생 그리워한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문학 평론가로 추리소설도 여럿 냈다. 196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동네에서 생긴 일』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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