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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깊이읽기] ‘최후의 심판관’ 9명의 판결로 본 격변기 대한민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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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헌법재판소,한국 현대사를 말하다
이범준 지음, 궁리
387쪽, 2만원

다섯 해 전 이른 봄날, 대통령 노무현이 탄핵 소추를 당했다. 당시 ‘탄핵’의 소란함 속에 국민들에게 또렷이 각인된 국가 기관이 있었다. 바로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다. 국가 최고 권력인 대통령직의 존속 여부를 결정짓는 헌재의 권위는 아득해 보였다. 아마도 노무현 탄핵 사건은 헌재 20년사 가운데 가장 극적인 판결로 기록될 터다.

책은 대통령 탄핵 사건과 같은 굵직한 현대사를 헌재의 판단과 고민을 통해 들여다봤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기소유예 사건 등 국가적 논란의 방향타 역할을 했던 헌재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겼다. 신문사 법조 담당 기자 출신인 저자는 꼼꼼한 취재를 토대로 헌재가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문제들을 어떻게 해석해왔는지 추적한다.

헌재 탄생의 결정적 계기였던 87년 민주화 투쟁을 시작으로 대표적인 사건을 나열하고, 이를 둘러싼 헌재의 고민을 짚었다. 이를테면 책은 민주화의 산물로 느닷없이 생겨난 헌재가 사무실도 갖추지 못한 채 불쑥 출범했던 장면에서 시작된다. 또 군사 정권의 잔재인 검열의 문제와 청춘남녀를 애태웠던 동성동본 금혼 조항이 위헌 판결에 이르게 된 과정도 생생히 전한다.

책 곳곳에서 ‘특종’을 확인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6개월간 신문·논문·속기록 등 1만장을 검토하고, 재판관·연구관·청와대 관련자들을 100시간 이상 인터뷰한 결과다. 해서 공개되지 않았던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심판의 뒷얘기 등이 책에 담겼다. 3분 34초 늦게 탄핵 선고가 시작된 사연과 기록으론 남기지 않은 소수 의견의 얼개 등을 밝혀냈다.

헌재 앞마당에선 ‘재동 백송(천연기념물 8호)’이 자란다. 뿌리는 하나지만 두 그루로 갈라진 소나무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뿌리를 내리고, 서로 의견이 다른 9명의 재판관들이 헌법적 지혜를 찾아가는 모습을 상징하는 듯하다. 헌재는 그 속성상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을 주로 다룬다. 굴곡 많은 현대사를 통과해 온 헌재의 흔적은, 그래서 온 나라가 아파하고 고민하며 걸어온 흔적이기도 하다. 그 상흔을 집요한 취재와 섬세한 문장으로 담아낸 책이다.

정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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