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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길 다른삶] 4. 미술계 원로 이대원과 김흥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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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기인(奇人)과 신사(紳士).우리 화단의 원로 김흥수(81)화백과 이대원(79)화백의 이름 앞에 붙는 별명이다.두 사람 다 50년 넘는 화력(畵歷)의 소유자로 개성있는 작품 세계를 확립한 화단의 원로지만 인생역정이나 면모는 별명만큼 대조적이다.

김 화백이 72세에 42년 손아래 제자와 재혼하는 등 '괴짜 화가' 로 불리며 작품 외적으로도 세간의 관심거리가 됐다면, 홍익대 총장을 지낸 이화백은 제도권안에서 착실히 살아온 '모범생' 이다.

이화백이 우리나라 최초의 화랑인 반도화랑을 운영하던 시절부터 그를 지켜본 갤러리 현대 박명자 사장은 "한 마디로 신사 중의 신사" 라고 평한다.

단정한 옷매무새와 반듯한 매너가 40년이 흐른 지금에도 한결 같다는 것. 수화(樹話)김환기.조각가 김세중과 더불어 미술계의 '신사 3인' 으로 통한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말쑥하게 걸치는 양복이 멋스러워 별명이 '베스트 드레서' 다. 일본어.중국어.독일어.영어 등 여러 외국어를 구사하는 데도 막힘이 없다.

김화백은 전시회 개막식마다 '튀는 옷차림' 을 하고 나타난다. 1990년 파리 뤽상부르 미술관 초대전 개막식에는 흰색 한복.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나타나 참석자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기도 했다.

작업할 때는 지금도 청바지를 즐겨 입고 색깔있는 안경.모자에 목걸이를 빼놓지 않는다. 턱수염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두 사람 모두 고령에도 불구하고 정정하다. 타고난 건강 체질인 김화백은 젊었을 때는 만능 스포츠맨이었지만 지금은 아침 산책을 즐기는 정도다.

채식 위주로 식단을 짜고 가끔 발 마사지를 받아 혈액 순환이 잘 되도록 신경쓰고 있다. 최근에는 감기가 낫지 않아 고생을 좀 했다.

이화백의 건강 비결은 수영. 매일 거르지 않고 동네 체육관으로 출근한다. 미식가로 소문난 그는 좋아하는 음식 가짓수를 꼽자면 한이 없다. 그래서 후배 화가들과 음식 기행을 자주 떠난다.

두 사람 간에 특별한 친분은 없다. 화가 권옥연씨를 공통의 벗으로 두고 있는 정도다.

남다른 부부 금슬로 소문이 났지만 두 화가부부의 살아가는 모양새는 다르다. 김화백은 그림자같은 동반자 장수현씨와 올해로 결혼 생활 8년째를 맞았다.

김씨 부부를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수족처럼 보필하는 장씨의 내조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지팡이를 짚은 김화백과 팸플릿을 손에 들고 일일이 설명을 하는 장씨의 모습은 전시회마다 자주 목격된다. 화가인 장씨는 올 가을 개관하는 김흥수 미술관 운영을 위해 잠깐 자신의 캔버스를 접었다.

한편 이화백은 고려대 의대 교수를 지낸 한살 아래 부인 이현금씨와 서로 다른 세계를 인정하며 '따로 또 같이' 50여년을 지내왔다. 그는 바쁜 시간을 쪼개 지난달 베트남.캄보디아 등지로 9박10일간 동반 여행을 다녀왔다. 부인의 소아과 학회 참가에 동행하기 위해서다.

그림을 시작하기까지 과정은 비슷하지만 작품세계는 대조적이다. 두 사람 다 부친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김화백은 군수를 지낸 아버지가 반대하자 "그러면 수재들만 간다는 도쿄미술학교에 들어가면 될 거 아니냐" 고 고집을 부려 3수 끝에 수석입학했다. 과수원집 아들로 유복하게 자란 이화백은 일단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들어갔다가 후에 인생 항로를 수정했다.

도쿄 유학 이후 김화백은 주로 해외를 누비며 자유와 예술을 구가했다. 외곬 이미지이면서도 타인의 인생과 예술에 대해 개방적 자세를 보이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해방 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그는 60년대말부터 미국 생활을 했으며 90년대 들어서는 러시아 푸시킨.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초대전을 여는 등 정력적인 활동으로 인생의 절정기를 맞았다.

이화백은 화가이면서 동시에 노련한 행정력을 지녀 미술계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홍익대 미대 학장.예술원 회장 등은 물론 화가로서는 최초로 대학총장까지 지냈다. 반도화랑을 운영하면서 박수근을 발굴한 안목도 높이 평가된다. 그러면서도 보스 연(然)하는 태도가 별로 없어 후배들의 신망도 두텁다.

김화백의 주 소재는 인체. 49년 제1회 국전에 출품한 '나부군상' 이 논란 끝에 결국 철거된 것은 유명한 미술 야사(野史)다. 사람의 몸이 갖는 아름다움을 통해 결국 인간과 삶을 이야기하려는 그는 이를 '하모니즘' , 즉 추상과 구상의 두 화면을 접합하는 고유의 방식으로 발전시켰다.

김화백이 인체라면 이화백은 자연이다. 농원 풍경을 주로 그려 '과수원 화가' 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는 이화백은 나무와 들.꽃을 불타오르는 듯 화사하게 그리는 것이 장기다.

점을 찍듯 자유롭게 구사하는 직선.사선.곡선이 생동감있게 움직인다. 눈부시게 만개한 봄날의 꽃을 보는 듯 마음을 환하게 밝혀주는 그림이다.

팔순 안팎의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을 즐기고 있는 두 사람. 미술에 대한 열정만은 더함도 덜함도 없이 똑같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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