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저(低)’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뭘 뽑을지 모르는 일본·대만과 달리 우리는 올해 유력 후보가 있다. ‘낮을’ 저(低)다. 저(低)는 오랫동안 ‘높을’ 고(高)에 치여 살았다. 높고 낮음(高低)이란 말은 있어도 낮고 높음(低高)은 없는 이유다. 『설문해자』는 아예 ‘고(高)의 반대말’이라 적고 있다. 그런 저가 올해는 달랐다. 펄펄 날았다. 우리 정치·경제·사회·문화를 휩쓸었다. 저를 빼놓고는 2009년을 말하지 못할 정도다. 올해의 한자를 뽑는다면 단연 ‘저’일 것이다.

경제의 저는 저성장의 저다. 올해 우리 경제는 간신히 0%대 성장을 기록할 전망이다. 외환위기 이후 가장 낮다. 물론 애초 예상했던 마이너스 성장보다는 훨씬 좋은 결과다. 그러나 나라 곳간을 열어 어렵게 끌어올린 결과물이고 보니 성이 안 찬다.

사회는 저출산의 저다.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지만 올해처럼 저출산이 화두가 된 적도 없었다. 가가호호 아이둘셋 하하호호 희망한국. 출산 장려 구호가 다시 등장하고 연일 부처마다 저출산 대책을 내놨다.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은 “저출산이 핵폭탄보다 무섭다”고 했다. 급기야 지난주엔 만 5세 취학, 셋째 자녀 취업 보장 같은 파격적인 제안도 등장했다. 저출산엔 묘책이 없다는 게 정설이다. 사교육·집값·취업난에 남녀 차별까지 우리 사회의 뒤떨어진 모든 시스템이 얽히고설켜 만들어 낸 괴물이 저출산이기 때문이다. 저출산이 고출산으로 바뀌는 날, 그날이 바로 선진 대한민국이 실현된 날이란 얘기가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정치는 ‘저소득층 프렌들리’의 저다. 달리 ‘서민 프렌들리’라고 부른다. 애초 이명박 정권은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내세웠다. 그러다 올해 들어 급속히 방향을 틀었다. 저소득층을 위한 정책을 잇따라 내놨다. 대신 고소득층과는 거리를 뒀다. 야당은 자기 텃밭을 건드린다며 발끈했다. 여야가 서로 ‘저소득층은 내 사랑’이라며 한판 전쟁을 치렀다. 급기야 청와대 길목엔 ‘서민 아닌 사람 서러워 못 살겠다’란 피켓까지 등장했다. 환경은 저이산화탄소(CO2)의 저다. 저CO2=녹색이다. 올해는 녹색의 해였다. 뭐든지 녹색으로 포장됐고, 녹색이면 뭐든 통했다. 4대 강·세종시도 녹색 포장을 거쳤다. 녹색을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신화는 올해 내내 한국 사회를 풍미했다.

문화는 루저의 저다. 이때의 저는 물론 한자가 아니다. 그러나 한자 저와 뜻은 같다. 저(低)는 본래 키가 작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낮다는 의미로는 사람 인(人)이 없는 저(<6C10>)가 쓰였다. 그러다 저(低)가 더 많이 쓰이면서 낮다는 의미까지 가져왔다. 저는 ‘키가 작은 사람→낮다’가 된 셈이다. 루저는 한 여대생이 ‘1m80㎝ 이하 남자는 모두 패배자’라고 한 데서 유행했다. 후폭풍이 요란했다. 키 작은 사내들의 콤플렉스를 자극한 데다 외모 지상주의를 적나라하게, 그것도 너무나 적확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런 세태를 ‘저’는 일찌감치 예견하고 있었던 셈이다.

저는 바닥이다. 더 잃을 것도 떨어질 곳도 없다. 무릇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 사물은 차면 기울고, 비면 차게 마련이다. 올해가 저라면 내년엔 고(高), 올라가고 채울 일밖에 안 남았단 말도 된다. 저, 이만하면 족히 ‘올해의 한자’로 꼽을 만하지 않은가.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