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기형도 '식목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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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어느 날 불현듯

물 묻은 저녁 세상에 낮게 엎드려

물끄러미 팔을 뻗어 너를 가늠할 때

너는 어느 시간의 흙속에

아득히 묻혀 있느냐

축축한 안개 속에서 어둠은

망가진 소리 하나 하나 다듬어

이 땅 위로 무수한 이파리를 길어올린다

낯선 사람들, 괭이소리 삽소리

단단히 묻어두고 떠난 벌판

- 기형도(1960~1989) '식목제(植木祭)' 중

식목일이다. 사람들이 흙을 파고 나무를 심고 있을 때 기형도는 시간의 흙 속에서 무엇인가를 캐내고 있었다. 꿈이거나 슬픔이거나 사랑이거나…, 아니면 안개 속의 무슨 소리 같은 거…. 그렇게 괭이소리.삽질소리를 내며 얼어붙은 언어의 땅을 쾅쾅 파헤치며 시의 이파리를 잘도 길어올리더니 스물아홉의 나이에 흙으로 돌아갔다. 이제 봄이 와서 산에 들에 나무들 잎피우는데 기형도의 잠은 아직도 깊은지?

이근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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