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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문화] 두달간 지속되는 'BBC프롬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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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 하이드파크의 밤. 11일밤 BBC프롬스의 마지막날 야외공연이 열린 하이드파트에 운집한 4만 관객이 국기를 흔들면서 애국가를 합창하고 있다. 앞쪽 가운데가 원형무대.

주말인 지난 11일 런던 시내 한가운데 자리 잡은 하이드파크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한 손엔 영국 국기(유니언잭)가 꽂힌 음식바구니, 다른 한 손엔 접이식 의자와 옷가지를 들었다. 공원 한 귀퉁이 그린 필드에 만든 가설 공연장 마당. 오후 4시부터 7시까지 3시간에 걸쳐 4만명이 입장했다.

같은 시간 영국 내 다른 지방을 대표하는 주요 도시에도 수만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북잉글랜드의 맨체스터,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 웨일스의 스완지,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까지. 행사장에 참석하지 못한 많은 사람은 BBC-2를 보기 위해 TV 앞에 앉았다.

이날 밤 늦게까지 전 영국이 주목한 세계 최대 클래식 축제 BBC프롬스(Proms)의 마지막 연주회다. 올해 110번째인 프롬스는 클래식의 대중화를 겨냥한 파격의 축제다. 여름 두달간 계속된다. 세계 정상의 심포니와 연주자들이 모여들어 74번의 축제마당을 연다. BBC심포니오케스트라(지휘 레오나드 슬라트킨)와 BBC 콘서트오케스트라(지휘 칼 데이비스)가 주인이다. 손님은 프라하 필하모니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요요마와 실크로드 앙상블 등등.

중심무대는 하이드파크 바로 옆에 붙어있는 로열앨버트홀이다. 로열앨버트홀은 정식 클래식 공연장이다. 그러나 분위기는 자유롭다. 늘 홀 중심을 비워두고 현장에서 입석표 1000장을 판다. 평소엔 누구나 줄을 서면 아주 싼 가격(보통 클래식 공연의 10~20%)에 최고급 공연을 즐길 수 있다.

피날레는 로열앨버트홀 외에 각 지방의 중심도시 명소에서 야외공연과 함께 진행된다. 각 공연장 나름의 공연을 마치고 밤 9시46분 2부 행사부터는 서로 번갈아가며 공연하는 모습을 대형 멀티비전을 통해 공유한다. 야외공연장에선 특별한 격식이 없다. 복장이 자유로움은 물론이고 술과 음식을 자기 맘대로 가져와 먹고 마신다.

이날 하이드파크 공연은 오후 5시 분위기를 잡기위한 예비공연(Introduction)으로 시작됐다. 경쾌한 팝음악이다. 살사 켈티카(Salsa Celtica)라는 그룹이 기선을 잡았다. 켈티카는 스코틀랜드의 켈틱풍을, 살사는 쿠바의 라틴풍을 말한다. 스코틀랜드 그룹이 아바나에서 배운 경쾌한 리듬을 켈틱 악기로 연주하는 독특한 무대였다. 스웨덴 그룹 아바(ABBA)를 그대로 흉내낸 짝퉁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는 호주의 4인조 '비욘 어게인'의 공연도 흥겨웠다. '워털루'에서 '댄싱퀸'에 이르기까지 시원하고 흥겨운 70년대 팝 8곡이 이어지자 앉아있던 많은 청중이 일어나 춤을 춘다.

본공연 클래식 무대에서 특별히 관객의 갈채를 모은 주인공은 이블린 글레니라는 퍼쿠셔니스트(타악기연주자)다. 피아노를 공부하다 12세 때 청각을 잃은 미녀다. 이후 타악기로 전공을 바꿔 미세한 진동을 촉각으로 느끼는 훈련을 반복해 세계적 연주자가 됐다. 그녀가 보여준 혼신의 연주는 자유분방하던 객석을 숙연하게 했다.

환호와 갈채가 이어지고 글레니는 활짝 웃으며 BBC콘서트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칼 데이비스를 껴안았다. 그리곤 곧 뒤돌아서 무대를 떠나던 그는 사회자가 꽃다발을 주기 위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달려간 사회자가 팔을 잡고서야 다시 환하게 웃으며 객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멀리 멕시코에서 온 세계 정상의 테너 라몬 바르가스의 무대도 화려했다.

두달에 걸친 대축제의 절정은 역시 마지막 2부 공연이었다. 온 국민이 따라부를 수 있는 전통가곡이 줄줄이 이어지면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마지막엔 영국 국가다. 이미 국기를 빼들고 일어선 청중이 온몸을 휘저으며 국가를 열창했다.

"신이여 자비로운 여왕을 살펴주소서. 우리의 귀하신 여왕님 만수무강 하소서. 신이여 여왕에게 복되고 영광스럽고 승리로 가득 찬 치세를 허용해 주소서..."

보이지 않는 지역 갈등과 대립이 여느 나라 못지 않는 영국. 지방 곳곳 주민들이 입을 모아 힘차게 불렀다. 축제는 단합의 무대다. 프롬스의 피날레는 동시에 여름의 끝이다. 밤공기는 싸늘한 가을이지만 축제의 열기만은 아직 한여름이었다.

런던=오병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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