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회장'의 후계구도] 집은 몽구…경영은 몽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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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주영 명예회장은 올해 나이 85세다. 거동이 어려워 휠체어를 타고 다닌다. 목소리도 작아 주변에서 잘 듣지 못할 정도다.

몸이 이렇게 불편하지만 분별력은 멀쩡하다는 것을 鄭명예회장은 몸소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이익치 인사파문' 이 불거진 지난 14일 이후 그는 울산 현대자동차.중공업 공장과 서산농장.강릉을 오갔다.

울산에선 '가는 세월' 과 '이거야 정말' 이란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를 흘렸다.

복잡한 심경을 정리할 것도 많았겠지만 여전히 정정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게 아니냐는 느낌을 주변에 주었다. 현대의 앞날을 좌우할 큰 결단을 앞두고 '총기가 흐려졌다' '특정인을 편애한다' 는 식의 뒷말을 남기지 않고 싶어했다는 얘기다.

실제로 그룹의 중대한 인사(이익치 회장의 고려산업개발 전보)를 뒤집어 내분을 자인하는 번복인사까지 하면서 후계구도를 정리한 것은 그의 판단력이 아직도 건재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鄭명예회장은 정치에 실패한 뒤 몸까지 쇠약해지면서 일찍이 후계구도를 생각해 왔다. 동생(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도 매섭게 내쳤다. 하지만 누구에게 현대를 물려줄 것인가를 정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차남 몽구씨에 대한 애정이 두터웠지만 격변기 그룹경영의 적임자는 5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5남이 해외출장 간 사이 차남계열에서 금융부문의 경영권을 장악하려는 기도가 있자 더 이상 결정을 미룰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참에 후계구도를 분명히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중후장대한 장치산업 위주의 현대로선 디지털시대에 전통 제조업에서 e-비즈니스로의 변신을 꾀할 때여서 鄭명예회장은 보다 젊은 5남을 결국 낙점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차남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던 것 같다. 그래서 묘책을 냈다.

동양적 유교 관습대로 사실상 장남에게 42년간 자신의 몸냄새가 밴 집을 물려주기로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이사를 서둘렀고, 몽구씨를 위로하고 자식들간 결속을 다지는 집들이도 했다.

이로써 鄭명예회장은 5남에게는 그룹의 핵심 경영권을, 차남에겐 경영권 일부와 집안의 법통을 물려줬다. 집안 일과 비즈니스를 분명히 나눠 정리한 것이다. '맨주먹으로 한국 최대의 기업집단을 일궈낸 鄭명예회장의 돌파력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드러났다고 재계는 혀를 내두르고 있다.

김동섭.홍승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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