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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빙자간음죄 위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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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남성이 결혼을 약속했다 하여 성관계를 맺은 여성의 착오를 국가가 형벌로써 보호하는 건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보는 것”

결혼하겠다고 속여 여성과 성관계를 맺는 ‘혼인빙자간음’에 대한 처벌 조항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다. 1953년부터 56년간 유지되면서 시대상을 반영해왔던 혼인빙자간음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이 처벌 조항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은 재심과 함께 국가에 보상을 청구할 수 있다.

헌재는 26일 혼인빙자간음죄로 기소돼 형사 처벌을 받은 임모(33)씨 등 남성 2명이 낸 헌법소원 심판에서 재판관 6(위헌)대 3(합헌)의 의견으로 형법 304조에 대해 위헌 결정했다. 형법 304조는 ‘혼인을 빙자하거나 기타 위계(속임수)로써 음행의 상습이 없는 부녀를 기망해(속여) 간음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재판부는 “혼인빙자간음 처벌 조항은 남성의 성적(性的) 자기결정권 및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헌법에 위반된다”고 밝혔다. 특히 “남성이 결혼을 약속했다고 하여 성관계를 맺은 여성의 착오를 국가가 형벌로써 보호한다는 것은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보는 것”이라며 “남녀 평등에 어긋날 뿐 아니라 국가 스스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부인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여성의 사회적·경제적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여성도 혼인과 관계없이 성적 자기결정을 하는 분위기가 널리 확산됐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강국 소장과 조대현·송두환 재판관은 “사생활 보호의 필요성보다 사회질서 유지의 필요성이 크다”며 합헌 의견을 냈다.

김승현 기자

◆성적 자기결정권=성행위를 할지와 그 상대방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 헌법 10조에 규정된 개인의 인격권·행복추구권에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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