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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대기자의 투데이] "NO"라고 말한 YS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꿈을 꾼다.

총선개표가 끝난 4월 14일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시민들이 영도다리 주변으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야당의 Q후보가 영도다리에서 뛰어내려 자결하는 모습을 구경하려는 인파다.

Q후보가 자신과 자신의 소속당이 선거에 패하면 영도다리에서 뛰어내려 바닷물에 빠져죽겠다는 공약을 지킬 것이라는 소문이 시내에 돌았다. 그는 한번 한다면 하는 사람으로 알려졌다. 'Q후보는 약속대로 바다에 뛰어들라!' 는 피켓을 든 사람들도 많다.

부산이 낳은 정치인의 '장렬한 최후' 를 구경하러 가려는 아이들을 말리는 어머니들도 있었다. 선거에 지면 당 지도부가 바다에 뛰어들겠다는 Q후보의 말이 부산시민들과 함께 죽자는 말로 와전되었기 때문이다.

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의 정치에 대한 미련과 부산.경남지역의 반(反)DJ정서를 선동해 정치적으로 재기하려던 사람들의 전략은 성공하지 못했다. 다른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부산.경남과 대구.경북에서도 여야 할 것 없이 지역감정 말고는 내세울 게 없는 후보들은 줄줄이 떨어졌다.

신문과 방송의 정치분석가들은 지역감정에 기대는 후보들이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유권자들의 양식(良識)이 지역감정을 이긴 결과라고 분석했다. 그들은 이제는 지역감정을 무기로 정치를 하려는 정치인들이 설 땅은 이땅에서 영원히 사라졌다고 환호했다.

그러나 꽃다발을 받아야 할 사람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었다. 그는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을 이겨냈다.

Q후보의 동지들이 잇따라 상도동 집으로 찾아와 "저희 당을 한번만 밀어주시면…" 하고 엎드려 머리들을 조아릴 때만 해도 그의 마음은 크게 흔들렸다. 이회창(李會昌)총재에 대한 괘씸한 감정도 고개를 들고….

부산.경남 민심을 한번 크게 흔들어 정치판의 큰손으로 복귀해 볼까….그러나 YS는 유권자들의 원초적 본능에 호소하는 전략을 갖고 정치적으로 재기하려는 사람들에게 힘을 보태지 않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그는 부산.경남과 대구.경북의 유권자들이 지역감정 선동에 오히려 반발하고, 전국의 어디에서도 지역감정에만 호소하는 후보들이 뜨지 않는데 주목했다.

그가 양식을 가진 몇사람의 측근을 둔 것도 다행이었다. 그들은 Q후보의 동지 들이 다녀간 뒤면 열심히 간(諫)했다. "지역감정은 안됩니다.

그들의 말대로 하시면 잘못되는 정치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쓰고 역사의 죄인이 되십니다." 아닌 게 아니라 언론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서 지역감정 선동을 망국적 행위로 규탄하고, 전국민이 자신의 입을 주시하고 있는 것도 YS에게는 여간 부담스럽지가 않았다.

이제 겨우 56세밖에 안된 존 메이저 전 영국총리가 재선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한 것도 무시 못할 사건이다. 일본에서는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가 또 지역구 유권자들의 진심으로부터의 만류를 뿌리치고 귀거래사를 부르지 않았는가.

그들은 무대에 남으라고 할 때 떠남으로써 세계인들의 갈채를 받는다. 욕심을 접고 크게 보자. YS는 자신의 역할을 기대하는 게 국민여론이 아니라는 것과, Q후보와 그의 당이 결과적으로 자신을 이용해 정치적인 생존을 꾀한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택도 없다!" 고 결연히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Q후보는 영도다리 근처에 나타나지 않았다. 영도다리가 아니라 광안리 앞바다라는 말을 믿는 사람들은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때 Q후보는 동지들과 광복동 뒷골목의 어느 복집에서 소주잔으로 거푸 건배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남이다!"

참 이상한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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