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싸라기 땅 강남 주유소들 "휘발유 가격파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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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서울지역이라도 휘발유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강남구 주유소는 1L에 평균 1798원이지만 중랑구 주유소는 1654원으로 1L에 144원이나 차이 난다. 주유소 휘발유 판매가격에 1차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정유사의 출고가격 외에 주유소가 들어서 있는 땅값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반포동 고속터미널 사거리. 터미널 옆 모서리에 위치한 GS칼텍스 폴 주유소로 승용차들이 줄지어 들락날락거리고 있었다. 휘발유 1573원. 1평방미터 공시지가가 946만원(3.3평방미터 3122만원)인 금싸라기 땅에 들어선 이 주유소의 23일 휘발유 1L 판매가격 1573원은 전국 주유소 평균 가격 1657원보다 84원 저렴할 뿐만 아니라 서울지역 평균가격 1723원과 비교하면 150원이나 낮다. 서울지역 주유소 중 최저 가격이다. 1L에 1379원인 경유 가격은 전국 평균과 서울 평균에 비해 각각 75원, 157원 싸다.

고속터미널 사거리에서 남쪽 법원 방향으로 300m 가량 떨어진 같은 GS칼텍스 폴을 단 주유소 역시 휘발유 1L에 1573원을 받고 있다. 경유 가격도 1L에 1379원으로 앞의 주유소와 같다. 같은 도로를 따라 남부터미널 방향으로 1km 더 가면 또 다른 GS칼텍스 폴 주유소가 나온다. 휘발유 1573원, 경유 1379원으로 앞의 두 주유소와 똑같다.

강남구, 송파구와 함께 ‘강남 3구’로 불리는 서초구에 있는 주유소가 ‘강남 최저가’를 내세우며 기름값 전쟁을 벌이고 있다.

가격 파괴 선두 주자는 고속터미널 주유소. D산업이 직영하는 이 주유소는 지난 여름 매장 리모델링을 단행했다. 이때부터 ‘저가’를 무기로 들고 나왔다. 이달초 1600원선을 넘었던 휘발유 가격을 지난 13일 1553원까지 내리기도 했다. 23일 현재 1L 판매가격 1573원은 그때보다 20원 올린 가격이다. D산업은 전국에 30여개의 주유소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질세라 대형 석유대리점 H석유가 가격 전쟁에 가세했다. 전국에 주유소 30개 이상을 보유한 H석유는 서초구에 있는 반포 그린 주유소, 서울 주유소 2곳의 판매가격을 똑같이 내렸다. 2곳 모두 D산업이 직영하는 주유소와 같은 도로 같은 라인에 위치한 주유소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져

두 메이저 대리점이 직영하는 주유소 사이에 낀 주유소들도 울며 겨자먹기로 가격 인하에 나섰다. 가격 파괴의 불똥은 전국 최고 판매량을 자랑하는 SK에너지 폴의 삼풍주유소로 떨어졌다. 자영인 이 주유소는 휘발유 가격을 1695원으로 내렸다. 1573원보다는 높지만 23일 현재 서초구 주유소의 평균가격 1717원보다 낮다.
매달 수천만원을 판촉비로 지출하는 이 주유소는 특별한 서비스로 근처 삼풍아파트 등에 거주하는 운전자들을 단골로 확보하고 있지만 ‘고래 싸움’ 후 매출이 적지 않게 떨어졌다고 한다.

두 메이저 석유대리점 직영주유소의 가격 전쟁 여파는 기름을 공급하는 정유사에도 미쳤다. GS칼텍스가 직영하는 법원 옆 서일주유소는 휘발유 가격을 삼풍주유소보다 더 낮은 1679원을 내걸었다. 고급 세차 서비스를 제공으로 단골 손님을 유지하고 있지만 매출은 뚝 떨어졌다고 한다. 기름을 넣기 위해 이 주유소에 들어온 운전자 중 일부는 “왜 이렇게 기름값이 비싸냐"며 보너스 카드를 내던지기도 했다고 한다.

전쟁의 여진은 다른 도로에 위치한 주유소를 덮쳤다. 예술의전당으로 향하는 도로에 위치한 SK에너지 폴의 두바이제3 주유소도 휘발유 가격을 1L에 1573원으로 내렸다. 이 주유소는 그 전까지 1639원을 받았다. 고래 싸움에 휘발유 1L에 66원씩을 희생시킨 것이다. 하지만 경유 가격은 따라 내리지 않았다.

한국석유공사가 20일 발표한 정유사 주간 공급가격에 따르면 이달 둘째주(8일~14일) 휘발유 출고가격은 1L에 1561원. 가격 파괴에 나선 주유소의 판매가격과 차이는 단돈 12원. 이 마진으로 주유소를 운영하는 건 자선 사업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손해를 감수하며 두 메이저 석유대리점은 가격 전쟁을 벌이고 있다. 주변에선 '감정 싸움'이 '가격 파괴'로 이어졌다고 보고 있다. 두 업체의 갈등설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고유가 시대에 사는 운전자들로서는 '가격 파괴 쥬유소'가 반가울 뿐이다.

노태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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