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치훈, 日 랭킹 1위 기성전서 왕리청에 2 대 3 몰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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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조치훈9단이 벼랑에 몰렸다.

일본에서 부동의 1인자로 군림해온 조9단은 랭킹1위 기성전에서 도전자 왕리청(王立誠)9단에게 2대3으로 뒤져 남은 두판 중 한판만 져도 타이틀을 잃게 될 위기에 처했다.

일본은 기성전 우승자가 곧 1인자인 시스템이기에 기성 상실은 조9단이 일본의 정상에서 밀려나는 것을 의미한다.

3년 연속 대삼관(大三冠)에 본인방(本因坊)10연패, 4년연속 최우수기사(MVP)등 불후의 업적으로 점철된 조치훈 왕국에 공습을 알리는 비상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려퍼지고 있는 것이다. 위기의 징후는 지난해부터 있었다.

조치훈은 지난해 조선진9단에게 랭킹 3위의 본인방을 빼앗겼고 연말엔 랭킹6위의 왕좌전에서 바로 왕리청9단에게 1대3으로 패해 타이틀 획득에 실패했다. 40대 중반에 접어든 조치훈이 예전과 다르다는 얘기가 슬슬 새어나왔다.

그런 점에서 2000년 첫 대결인 이번 기성전은 조치훈 시대가 과연 언제까지 갈 것이냐 하는 중대한 시험 무대로 여겨졌다. 더구나 상대는 조9단의 천적이라 할 만한 왕리청9단이다.

왕9단은 이번 기성전 7번기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조9단과 26승1무26패라는 그야말로 막상막하의 전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난 1월 12, 13일의 첫판에서 조9단은 '이틀바둑의 왕자' 답게 백으로 가볍게 4집반을 이겨 주위의 우려를 씻어주는듯 싶었다. 조9단은 1998년 랭킹2위의 명인전에서 왕9단의 도전을 4승1무2패로 막아낸 적이 있다.

2국은 왕9단이 대마를 잡고 불계승했다. 한국식의 힘바둑을 구사하는 왕9단의 파괴력이 돋보였다.

조9단은 그러나 3국에서 불계승했고 여세를 몰아 2월 16, 17일 열린 4국에서도 시종 앞서나갔다.

이 바둑을 이겼으면 조9단의 기성전 5연패는 무난하게 이뤄졌을 것이다.

그런데 막판에 변고가 일어났다. 초읽기에 쫓긴 조9단이 착각을 범해 대마가 잡히면서 승부가 일순간에 뒤집힌 것이다.

3승1패가 될 것이 2승2패로 혼미해졌고 이로 인해 정신적 타격을 입었는지 조9단은 2월 23, 24일 열린 제5국에서도 치열한 공중전 와중에 대실수를 범해 5집반을 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2대3.

우승상금 3천3백만엔(약3억5천만원)의 기성전 6국은 3월 8, 9일 이마바리(今治)현 이마바리호텔에서 속개된다. 실수가 많아진 조9단의 행보는 불안하다.

절호의 기회를 잡은 왕9단은 전력을 다해 밀어붙일 것이다. 그러나 조9단은 휠체어 대국, 3연패후 4연승, 8전9기등 난관을 돌파해온 숱한 전설을 갖고 있다. 벼랑에 선 조9단의 다음 한판에 한국과 일본 바둑계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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