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균의 세상 탐사] 오바마 효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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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호 02면

버락 오바마는 달랐다. 조지 W 부시 때와는 대조적이었다. 같은 미국 대통령의 한국 방문이지만 차이가 컸다. 험악하고 어설펐던 반미 시위는 이제 시들해졌다. 한때 낯익던 그 거친 장면은 밀려났다. 친미단체들의 환영 집회가 광화문 거리를 대신 차지했다. 이명박(MB)·오바마의 정상회담은 친밀감이 넘쳤다. 오바마는 아시아 4개국을 돌았다. 그중 “서울 방문이 가장 짧았지만 가장 편했다.”(뉴욕 타임스).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 한국의 과거 정권 시절을 떠올리면 그렇다. 2005년 11월 부시는 경주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만났다. 오바마처럼 그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일정에 맞춰 방한했다. 당시 주한 미국대사 알렉산더 버시바우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 회담이 역대 한·미 정상회담 중 최악이었다.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한 자금 동결을 놓고 1시간 넘도록 격렬한 논란을 벌였다.”

BDA 계좌는 김정일 정권의 비자금 창구라는 의심을 받았다. 미국은 평양의 아킬레스건을 포착했다. 금융 제재는 위력적이었다. 군사·외교적 압박보다 효과적이었다. 그 문제를 놓고 회담장에 짜증과 얼굴 붉힘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 회담장 밖의 모습들도 긴박했다. APEC 반대 집회는 거셌다. 대부분 집회를 친북·반미 세력이 주도했다. 외신들은 “보기 싫은 광경과 마주한 부시”로 묘사했다.

양국은 서로 마땅치 않았고 멀어졌다. 미국은 실망과 불만을 감추면서 한·미 동맹을 격하시켰다. 당시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일본과 호주는 미국의 동맹이다. 한국은 파트너”라고 등급을 매겼다. 그런 상황은 바뀐 것이다. 헝클어진 한·미 관계는 상당 부분 정상화됐다. 양국의 리더십 덕분이다. 이 대통령의 관계 복원 의지가 주효했다.

오바마 효과는 그 반전을 이끌었다. 오바마 삶의 성취와 이미지는 극적이다. 거만하다는 부시의 평판과 다르다. 흑인 대통령의 존재가 아메리칸 드림의 강렬한 상징이다. 그것은 미국에 대한 젊은 세대의 시각을 재정비해 줬다. 미국에 대한 우호적 시선을 넓혔다. 반미 정서는 급격히 퇴조했다. 리더십은 나라의 이미지를 바꾼다.

한·미 관계 복원에는 국민적 각성과 경험이 깔려 있다. 다수 국민은 친북·반미 세력의 실체를 깨달았다. 그 세력은 북한 주민의 인권 참상을 외면하면서 반미 정서를 교묘히 키웠다. 이제 국민 대다수는 그들의 퇴행적 행태에 개탄하고 어이없어 한다.
격세지감은 또 있다. 경제·군사 대국이 된 중국의 위상이다. 오바마의 아시아 순방은 중국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최강 미국의 입김은 먹히지 않았다. 인권과 자유민주주의라는 미국의 가치를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노(No)’라고 나오는 중국의 위세 앞에 오바마는 미국의 한계를 실감했다.

중국의 강세는 우리에게 기회면서 도전이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수출시장이다. 중국의 군사·외교적 힘이 커지면 한반도 정세는 미묘해진다. 중국의 눈치를 더 봐야 한다. 그것이 한국의 역사적 경험이다. 중국 쪽 수출을 늘리고 더욱 가깝게 지내야 한다. 그러면서 중국의 한반도 영향력을 적절히 제어해야 한다. 그럴수록 한·미 동맹은 긴요하다. 용미(用美)의 지혜를 세련되게 발휘해야 한다. 한·미 동맹은 동북아 질서의 균형을 유지하는 지렛대다.

북한의 통미봉남(通美封南) 전략은 움츠러들었다. 한·미 관계의 복원 때문이다. 돈은 남한에서 얻고 핵 문제는 미국과 거래한다는 게 북한의 오랜 전략이다. 갈등의 한·미 관계에선 그 분리 전략은 효력을 발휘했다. 이제 한·미 관계가 제자리를 찾으면서 북한의 속셈은 먹히지 않는다.

그런 것들이 한·미 동맹의 전략적 묘미다. 한·미 동맹은 북한의 핵위협에 대처하는 확실한 수단이다. 더구나 하토야마(鳩山) 일본 정부는 미·일 동맹과 거리를 두려 한다. 미국과 불화를 겪고 있다. 그것은 한·미 동맹의 틀을 다질 수 있는 절묘한 찬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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