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씨가 쉽게 쓴 '고구려 700년 수수께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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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고구려' 라고 하면 흔히 대륙을 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하면서 '한민족' 이나 '기상' 이란 단어가 연상된다.

이런 민족정서 속에 역사적으로 자리매김한 고구려는 2천년 전 고대국가다.

고구려에 대한 1차 사료(史料)는 거의 없다.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책에서 한 두 구절 끌어다 쓰거나 수백년 뒤에 쓰여진 삼국사기에 의존하는 것이 고작이어서 역사적 사실 자체도 부정확하다.

그래서 고구려는 역사라기보다 신화나 전설처럼 느껴진다.

당연히 학계의 연구도 적다.

그나마 기존의 연구들은 많은 논쟁으로 점철된 전문적인 내용들이라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끼' (이덕일 지음.대산출판사.1만원)는 이 독특한 고대국가에 대한 대중적 관심에 답하는 역사이야기 책이다.

대중의 접근을 쉽게 하기 위해 일반인들이 가장 궁금해 할 만한 25가지 질문을 던지고 이에 답하는 방식으로 풀어썼다.

저자가 책을 쓴 동기 역시 대중적으로 널리 퍼져있는 민족주의적 발상이다.

고구려의 대륙적 기상을 회복함으로써 21세기에 세계적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다.

첫번째 질문은 '고구려의 군사력이 강했던 이유' 다.

이는 '광개토대왕이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이유' 이며, 고구려라는 국가의 성격규정이기도 하다.

저자는 '고구려에는 농사를 짓지 않고 앉아서 먹는 자(坐食者)가 1만여명이나 된다' 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 의 기록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한다.

고구려의 인구를 3만여호라고 기록하면서 앉아서 먹는 사람이 1만여명이라면 매우 기형적인 구조다.

저자는 이 1만여명의 '대가(大家)' 집단을 전문적인 전투계급으로 본다.

고구려는 지정학적으로 끊임없이 대륙의 국가들과 싸움을 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국가였고, 생산이 적어 약탈을 해야만 꾸려갈 수 있는 나라여서 이렇게 기형적일 정도로 많은 전투력을 보유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생존을 위한 '호전성' 이다.

광개토대왕이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인의 전투력을 강력한 왕권 아래 하나로 묶어낸 시너지 효과 때문이다.

광개토대왕은 국방.군사를 총괄하는 '사마(司馬)' 라는 관직을 처음으로 만들고, 전장에서 '왕당(王幢)' 이라는 깃발을 사용했다.

이는 부족별로 분산돼 있던 전투력을 국가차원에서 결집했다는 증거로 해석된다.

저자는 유리왕이 지었다는 한시 '황조가(黃鳥歌)' 를 통해 고구려 왕실의 속사정, 초기 고구려의 국가형태를 들여다보기도 한다.

2천년전 고구려왕이 왜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보내고 '꾀꼬리가 부럽다' 며 한숨을 지어야만 했는가.

떠나보내야했던 여인(치희)는 중국인이고, 그녀를 내쫓은 화희는 고구려 유력가문의 딸이다.

부여에서 내려와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의 아들인 유리왕은 토착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하희의 투기를 꾸짖지 못하고 혼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 것이다.

이는 초기 고구려가 부족국가의 연합체적 성격이었음을 말해준다.

물론 이런 사정은 소수림왕과 광개토대왕을 거치면서 강력한 왕권중심으로 바뀐다.

저자는 고구려가 망한 이유를 '대외전쟁이 뜸해지면서 전사(戰士)국가로서 정체성을 잃었기 때문' 이라고 분석했다.

장수왕의 평양천도 이후 정복전쟁보다 수성에 전념하면서 고구려의 호전성이 내부분열로 왜곡됐다는 것이다.

중국의 '구당서' 는 고구려말기 상황에 대해 '귀족들이 서로 싸울 때 왕은 궁궐문을 닫고 스스로 지킬 뿐 이들을 제어하지 못했다' 고 기록했다.

왕이 귀족들의 싸움에 밀리다보니 왕위가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고 왕이 시해되는 사건이 잦아지고 나라는 멸망의 길로 치닫는다.

저자는 이밖에도 한일(韓日)고대사학계의 쟁점이 돼온 광개토대왕비의 변조여부, 고구려의 데릴사위제와 같은 풍속, 연개소문과 같은 인물얘기까지 다양한 관심사를 다루고 있다.

이덕일(40.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사진)씨는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와 같은 저서로 꽤 알려진 재야사학자다.

그는 숭실대에서 근대사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강사로 활동하다 2년전부터는 전업 저술가로 쉬운 역사책만 써왔다.

[저자 한마디]

그는 고구려 얘기를 쓴 동기에 대해 "고구려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은 높은데 시중에 나와 있는 책은 거의 없어서" 라고 밝힌다.

직접적인 동기는 1993년 옛 만주땅을 찾았을 때 느낀 '고향에 대한 원초적 그리움' 이란다.

그는 "역사는 인간학" 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이 나눠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펼치는 '역사대중화 작업' 은 "정통학계가 역사의 대중화 노력에 소홀해왔기에" 강단을 포기하고 나선 작업이라는 것이다.

그는 '비정확성' 에 대한 학계의 비판에는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나름대로 사료에 충실하고, 합리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학계의 논쟁을 언제나 환영한다."

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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