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 '무늬만 벤처'가 가져올 폐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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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요즘 직장인의 화두는 벤처다. 누구는 벤처기업을 차려서, 누구는 관련주식을 사서 떼돈을 벌었다는 얘기가 이제 뉴스도 안될 정도다. 어느 기업에서 한 부서가 몽땅 벤처로 갔다는 말도 들린다. 하기야 구조조정이라고 무자비하게 감원시키던 기업이 이제와서 신의를 내세울 처지도 못된다.

원래 벤처라 하면 연상되는 그림이 있다. '왕따' 당한 한 교수가 자기집 헛간 뒷구석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제품을 만들어 일약 백만장자가 되는 것이다.

영화에서만 나오는 것 같은 얘기도 실제로 가능해지고 있는 시대다. 그러나 요즘 돌아가는 사태를 보면 이런 변화가 무조건 잘된 것이라 보기엔 어렵다.

벤처란 이름만 달면 다 돈을 번다는 생각 때문인지 '어중이 떠중이' 들도 모두 벤처로 나서고 있다. 과연 벤처로 가는 사람들에게 그만한 기술력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벤처란 기술력이 바탕이 돼야 한다.

기술력 없이 뛰어드는 벤처의 환상은 금방 물거품이 될 것이다.

문제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비록 벤처가 아니라지만 성실하게 산업현장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도 적지 않다. 기존 산업에서도 우리나라는 아직 넘어야할 수많은 기술장벽이 있다. 초등학생 때 만들어 보는 모터만 하더라도 그렇다.

우리는 아직도 장난감용 모터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있다. 전지 소모가 심하고 정밀도가 떨어지며 고장이 잦기 때문이다. 때문에 장난감도 알맹이는 모두 수입하고 껍질만 국산인 제품이 많다.

이런 기술의 장벽을 넘기 위해 아직도 산업현장에는 많은 일꾼들이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있다.

그러나 작금의 세태는 이들에게 심한 허탈감을 준다. 때문에 지금까지 자신이 생명과 같이 느끼던 일을 내던져 버린 채 막연한 환상에 이끌려 산업현장을 떠나는 일이 비일비재로 발생한다.

벤처 열기가 뜨거울수록 이런 현상은 가속될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애써 가꿔온 우리의 산업현장도 급속히 황폐화된다. 어설픈 벤처가 당연한 종말을 맞을 때 우리 산업사회에 닥칠 사막화 현상을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를 감출 수 없다.

박경수<한국과학기술원 산업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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