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저출산 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7면

저출산 현상이 우리 사회를 달구는 화두로 떠올랐다. 사실 한 명을 겨우 넘기는 우리 사회의 합계출산율은 그저 저출산을 넘어 초저출산 현상(lowest low fertility)이라고 부르는 게 옳다. 그렇다면 우리나라가 세계 최악의 초저출산 국가가 된 이유는 뭘까. 나라가 출산을 금지한 게 아닌 이상 국민들 개개인의 합리적 선택의 결과라 할 수 있다.

10여 년 전만 해도 결혼을 위해 남자에게 요구되는 조건은 취직이었고, 여자의 경우는 나이였다. 즉 남자는 취직을 하면 결혼하고, 여자는 나이가 차면 결혼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 문제가 생겼다. 경제위기 이후 청년층 실업이 대량화·장기화됐다. 노동시장 유연화 과정에서 고용 안정성은 흔들리고 불확실성이 젊은이들의 일상이 돼버렸다. 미래가 불확실해지자 청년들은 결혼 연기, 교육 연한 늘리기 등으로 대응했다. 여성들에게도 취업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의 성차별적 노동시장 관행을 떠올릴 때 여성들의 취업전쟁은 특히나 결혼 연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결혼을 연기하는 젊은이들이 많은 것이 우리 사회 출산율을 떨어뜨리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뿐 아니다. 어린 자녀를 둔 가정이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을 병행하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가. 아이를 믿고 맡길 데도 마땅치 않고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우리 사회에서 남성이 육아에 참여하기도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모두 다 대학을 가야 하는 우리 사회 분위기 속에서 초절정의 사교육비를 감당하는 일 역시 모든 부모의 가슴을 짓누른다. 이쯤 되면 되도록이면 자녀를 낳지 않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의 저출산 문제를 야기하는 메커니즘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문제들이 다 들어 있다. 청년 실업, 성차별적 노동시장, 가부장적 가족제도, 학력 차별, 학벌 차별, 통념을 벗어난 형태의 가족에 대한 차별, 낙태 등등 말이다. 저출산 문제의 해법 역시 종합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다. 최근 한 사회의 인간개발지수(Human Development Index)가 일정 수준 이상 높아지면 그 사회의 출산율도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필자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경우 이른바 여성권한척도(Gender Empowerment Measurement)가 높은 국가일수록 출산율도 높았다. 재미있는 건 한국이나 일본같이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을 보유한 나라들은 그 사회의 인간개발지수는 높으면서 여성권한척도는 지극히 낮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사회 전반에 양성 평등의 가치관이 정착되는 것이 출산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새해엔 제2차 저출산고령사회기본계획(새로마지플랜)을 마련해야 한다. 그동안 추진된 저출산 대책은 저소득층 중심의 복지정책적 성격을 지녀 실효성이 떨어졌다는 평가가 있는 만큼 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사회 저출산 현상의 핵심 집단은 결혼하고 싶어도 결혼하지 못하는 청년층이다. 이들에 대한 취업 지원은 가장 주력해야 할 저출산 대책이다. 그러나 결혼한 여성들 사이에서도 취업 여부에 따라 출산율 추이가 달라진다. 남녀 모두 일과 가정생활을 병행할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지원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러자면 자녀를 낳고 키우는 일에 남성과 여성이, 지역과 정부, 기업이 함께해야 한다. 결국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행복한 사회를 만들면 현재와 같은 기형적인 초저출산 현상은 사라질 것이라고 단언한다. 산적한 과제들이 많지만 남녀 모두 일과 가정을 병행할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박수미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