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분수대] 조반유리(造反有理)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중국인들은 1960년대 이후 10년의 문화혁명 기간을 흔히 '천하대란의 시대' 라고 한다. 역사의 걸음을 수십년 뒤로 물린 파괴와 혼란의 세월로 치부하는 것이다.

대란(大亂)으로 대치(大治)를 이뤄보겠다던 마오쩌둥(毛澤東)과 수하 4인방이 주역이었지만 문혁(文革)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무래도 붉은 완장을 차고 마오어록을 흔들어대며 '조반(造反)' 을 외치던 홍위병들이다.

거기에 이들로부터 조반의 대상이 돼 모진 박해를 받던 끝에 비극적 삶을 접어야 했던 류사오치(劉少奇)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겹쳐진다.

문혁과 함께 홍위병조직이 공식화한 것은 1966년 8월 칭화(淸華)대 부속중학 홍위병들이 마오에게 편지와 '조반정신' 을 논한 두장의 대자보를 보내고 마오가 이를 지지하는 답서를 보내면서였다.

마오는 그 답서 속에 '조반유리(造反有理.반동파에 대한 그대들의 조반은 옳다)' 라는 유명한 문구를 넣었다.

8월 18일 천안문에서 1백만명의 홍위병을 만난 것을 시작으로 마오는 그해 11월 하순까지 모두 여덟차례 1천만명이 넘는 학생.교사.홍위병들을 접견했다.

그때부터 홍위병들은 거칠 것이 없었다. "사령부를 폭격하라" 는 마오의 지시에 따라 그들은 수정주의자로 몰려 있던 국가주석 류사오치 일파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劉가 부인 왕광메이(王光美)와 함께 홍위병들에게 끌려간 것은 67년 여름이었다. 그로부터 이어진 무수한 구타와 고문으로 劉는 잠깐 사이에 폐인이 돼버렸다.

몸이 너무 망가져 "음식이 있어도 입에까지 가져갈 수 없고 옷을 입는데 두시간, 식당까지의 짧은 거리를 걷는 데도 한시간이 걸렸다" 고 한다.

69년 10월 베이징(北京)에서 허난(河南)성 카이펑(開封)으로 옮겨진 劉는 그후 한달도 못돼 지하감방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알몸을 누인 채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홍위병들과 마오가 짝맞춰 외친 '조반' '조반유리' 의 정신은 이렇듯 피비린내 나는 살육과 광란의 이미지에 맞닿아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아직도 문혁을 한바탕 악몽으로만 기억한다. 얼마전 자민련 김종필(金鍾泌)명예총재가 '마오쩌둥 비록(秘錄)' 이란 책을 들어 문혁시절의 마오 얘기를 하더니 그제는 자못 격앙된 어조로 "우리나라에 한때 세상을 뒤집어 엎던 조반유리가 돌아다니고 있다" 는 말을 했다.

짐작으론 총선시민연대의 최근 낙천활동과 그걸 대세로 알고 일정부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한 대통령을 빗댄 말 같기도 하다.

비유의 적절성을 떠나 '조반유리' 란 말 자체가 주는 으스스함에 말의 폭력성을 새삼 느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