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실은 신라로 들어가는 열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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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드라마 ‘선덕여왕’이 화제다. 주인공 선덕여왕(이요원 분)보다 더 큰 관심을 끈 배역은 정적 미실(美室)이다. 배우 고현정이 연기한 미실은 뛰어난 판단력과 카리스마를 갖춘 권력의 화신이었다. 또 미색(美色)으로 남자들을 좌지우지하던 희대의 요부였다. 지난 10일 방영분에서 미실은 나라를 위해 권력을 포기하고 자결을 택하는 의로운 인물로 그려졌다.

그럼, 미실은 누구인가. 드라마가 만들어 낸 가상의 인물인가, 아니면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인가. 드라마 속 사건들은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화랑세기』서 미실 처음 발견해
이종욱(63·사진·역사학) 서강대 총장은 “미실은 실제 인물이지만 드라마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고 말했다. 12일 본지와 인터뷰를 한 이 총장은 잊혀졌던 미실을 처음 되살린 주인공이다. 그는 지난 35년간 한국 고대사, 특히 신라사 연구에 매진해 왔다. 1999년엔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 32명의 혈통을 밝힌 『화랑세기』를 역주해(번역·주석·해석)했다. 이 화랑세기를 바탕으로 진흥왕·진지왕·진평왕을 차례로 섬기며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렸던 미실을 찾아냈다. 미실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다른 역사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89년 처음 필사본이 발견된 『화랑세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여인은 바로 미실이었다. 이 총장은 화랑세기에 기록된 미실의 행적을 추적·정리해 2005년 『색공지신(色供之臣) 미실』이라는 책을 썼다.

-드라마의 몇 % 정도가 사실인가.
“미실·문노·세종·설원랑·하종·보종 등은 실존했던 인물이다.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이나 명칭 중엔 동일한 것이 많다. 하지만 내용은 역사와 다르다.”

-어떤 점이 다른가.
“미실과 선덕여왕이 권력을 놓고 대립했다는 설정부터가 불가능하다. 미실은 545년에서 549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선덕여왕이 즉위 당시인 632년 미실의 나이는 80대였다. 그리고 미실은 쿠데타를 일으킬 인물이 아니다.”

이 총장은 미실이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미실의 이모이자 진흥왕의 왕후였던 사도(思道)의 후원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당시엔 단 두 개 가문의 출신만 왕의 아내나 후궁이 될 수 있었다.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이라고 불리는 이 두 가문은 왕의 선택을 받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미실과 사도왕후는 대원신통 출신으로 가문의 세를 강화하기 위해 힘을 합쳤다. 사도왕후는 남편인 진흥왕에게 조카 미실을 후궁으로 추천했다. 또 미실을 자신의 아들 진지왕의 왕후로 만들기 위해 색공(지위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성(性)을 바치는 것)을 지시했다. 손자 진평왕에게까지 색공을 바치도록 했다. 이 총장은 “색공은 단순히 에로티시즘의 문제가 아니라 고도의 정치적 행위였다”고 말했다. 그 대가로 자신과 일족들이 부귀를 얻었기 때문이다. 미실이 왕이 되려 했다는 것은 드라마적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일축했다.

-드라마적 상상력과 역사적 상상력은 어떻게 다른가.
“E 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소설은 역사와 아무 관련 없는 저작물로서 창작을 위해 과거 사실을 이용한다고 설명한 바 있다. 역사적 사실을 이용해 현재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승자가 아닌 입장에서 본 역사를 구성하려면 상상력이 필요한 것 아닌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역사적 상상력은 역사적 맥락을 기반으로 한다. 맥락을 무시한 채 새로운 사건을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진짜 역사를 통해서야 인간사의 본질을 파헤칠 수 있다.”

-드라마를 통해 신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관심이 높아진 건 반가운 일이다. 드라마가 진짜 신라인의 모습을 보여 주려고 했다면 통역이 필요했을 것이다. 신라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과 요즘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다르다. 현재의 이야기를 해야 시청자들이 관심을 갖지 않겠나. 하지만 드라마를 진짜 역사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드라마 시작 때 자막으로 ‘드라마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이 아닙니다’고 알리는 정도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근친혼은 고대 지배층의 공통 현상
-왜 미실에게 주목하게 됐나.
“미실 자체가 신라로 들어가는 열쇠다. 그의 일생을 통해 신라 왕실의 작동 시스템이나 그 왕조를 지탱한 사회구조가 보이기 때문이다. 신라 왕실은 왕·태자·왕후·후궁을 비롯한 지배 세력들이 근친혼을 통해 혈연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다.”

-왜 미실은 『삼국사기』에는 등장하지 않나.
“『삼국사기』를 쓴 사람은 고려 유학자 김부식이었다. 남편을 두고도 세 명의 왕을 섬겼다거나 후궁이 왕을 폐위시켰다는 역사를 기록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삼국사기』는 있었던 일을 그대로 기록하고자 했던 책이 아니라 후세를 교육시키려는 일종의 국사 교과서였다.”

그가 미실의 이야기를 찾아낸 『화랑세기』는 신라인 김대문이 썼다는 책으로, 『삼국사기』 등에도 책의 존재 자체는 언급돼 있다. 이 책은 89년(32쪽 분량)과 95년(184쪽 분량) 필사본이 발견됐다. 일부 사학계에서는 이 필사본이 가짜이며 소설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이 총장은 “『화랑세기』야말로 신라 왕조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책으로 결코 허구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 『화랑세기』가 허구일 수 없다는 건가.
“『화랑세기』는 신라 귀족 가문의 김대문이 당시 귀족들의 혈통을 밝히기 위해 쓴 책이다. 신라의 지배 계층은 그 수가 많지 않았고 근친혼을 통해 지배 계층의 수를 제한함으로써 권력 집중을 유지했다. ‘신국(神國)’ 신라를 다스리는 ‘살아 있는 신(神)’인 왕과 얼마나 가까운 관계인가에 따라 신분을 결정했다. 4~5대 조상부터 따지는데 왕후의 자손인지, 후궁의 자손인지, 바람을 피워 낳은 자식인지까지를 모두 따졌다. 『화랑세기』는 후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쓰여진 책이다. 따라서 사실에 충실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촌형제들끼리 결혼하고, 한 여자가 여러 명의 남자를 거느린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1500년 전 신라를 지금의 윤리적·사회적 잣대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성적으로 지금보다 훨씬 개방돼 있었고, 지배 세력의 친인척 간 결혼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는 세계 여러 지역의 고대 왕국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

‘민족’이란 틀 버려야 신라가 보인다
-신라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신라의 삼국 통일은 현재의 한국과 한국인을 만든 역사의 중간 지점이다. 해방 이후 학문 권력을 장악했던 주류 사학자들은 민족이라는 개념을 발명해 신라를 민족의 반역으로 몰았다. 당나라를 끌어들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당시엔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세 개의 왕국이 치열한 영토 싸움을 벌이고 있었을 뿐이다. 그 싸움에서 신라가 승리한 것이다. 그리고 정복자 신라의 사회제도가 고려·조선으로 이어져 현재 한국 사회의 원형이 됐다. 박씨·김씨 등 현재 한국의 큰 성씨들이 모두 신라인들을 조상으로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중국과 대적한 자랑스러운 조상으로 고구려인을 꼽는다.
“부모가 자랑스럽지 않다고 해서 부모가 아닌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역사를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역사에는 수많은 갈림길이 있다. 고구려가 만일 삼국을 통일했다면 지금의 한국은 존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군사적으로 강대했던 고구려를 중국은 방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우린 모두 중국어를 쓰고 중국 옷을 입고 있을지도 모른다.”

-민족이라는 개념을 발명했다는 말이 생소하다.
“민족이란 1900년대 초 단재 신채호 선생을 위시한 당시 지식인들이 일제 침략에 저항하기 위해 처음 만들어 낸 개념이다. 해방 후 국사 교육을 담당했던 관변 사학자들은 이 민족이란 개념으로 신라를 재단했다. 그러다 보니 외세를 끌어들인 신라는 부끄러움의 대상이 됐다. 더 나아가 미국에 의지하는 한국 정부가 부끄러워지고, 민족의 자주성을 강조하는 북한이 정통성을 주장하는 결과까지 낳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민족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박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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