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제임스 릴리 전 주한 미국대사 별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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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릴리(사진) 전 주한 미국대사가 12일(현지시간) 워싱턴의 시블리 메모리얼 병원에서 전립선암 합병증으로 별세했다. 81세.

릴리 전 대사는 1987년 6월항쟁을 전후한 86~89년 주한 대사를 지냈다. 이어 91년까지 주중국 대사를 맡았다. 그는 이에 앞서 오랜 기간 아시아 지역에서 중앙정보국(CIA) 요원으로 일해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과 외교의 산 증인으로 통했다.

릴리 전 대사는 전두환 대통령 집권 말기와 노태우 대통령 집권 초기에 주한 대사로 일했다. 당시 한국에선 민주화 요구가 거셌다. 그는 2004년 펴낸 자서전 『중국통(China Hands)』에서 6월항쟁 당시 선포 직전까지 갔던 계엄령을 가까스로 막았다고 회고했다. 전두환 정부가 계엄령 선포를 검토하자 그는 미 국무부에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보내달라고 했다. 그런 뒤 6월 19일 계엄령에 반대하는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전 대통령을 만나 “계엄을 선포하면 한·미 동맹이 훼손될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압력을 넣었다. 앞서 청와대가 눈치를 채고 접견 요청을 거절하자 그는 ‘동맹국 대통령의 친서를 무시하느냐’며 밀어붙여 면담을 이뤘다.

그가 중국 대사로 일하던 89년 6월 중국에선 계엄군이 시위 군중에 무차별 발포해 많은 사상자가 낸 천안문 사태가 발생했다. 릴리 전 대사는 당시 중국정부의 인권탄압을 강하게 비난하며 사태 해결을 위해 물밑 조율작업을 벌였다. 당시 미 대통령은 조지 H.W 부시(아버지 부시)였다. 릴리 전 대사는 73년 CIA 요원으로 중국에 파견됐다. 아버지 부시는 그때 베이징에서 주중 CIA 지부장으로서 릴리 전 대사와 함께 일했다.

28년 중국 칭다오에서 태어난 릴리 전 대사는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석유관련 사업을 했다. 그는 아버지 때부터 따지면 100년에 걸쳐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와 인연을 맺었다. 릴리 전 대사는 평소 “한국은 나의 뇌와 심장 속에 녹아들어 있다”고 말하곤 했다. 큰 형을 따라 예일대를 졸업한 뒤 조지워싱턴대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51년 CIA에 몸담았다. 한국전쟁 때는 만주지역에서 정보수집 활동을 벌였다. 78년까지 27년간 도쿄와 베이징·대만·홍콩·라오스·캄보디아·방콕 등지를 무대로 활동했다.

릴리 전 대사는 그 뒤 국무부로 자리를 옮겨 외교관 활동을 시작했다. 81∼84년엔 대만주재 대사관 격이던 대만 미국연구소 대표로 미묘했던 양안 관계를 다뤘다. 이어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거쳐 주한 대사를 맡았다.

그의 별세 소식을 들은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릴리 전 대사는 미국의 동아시아 관계 설정에 도움을 줬다”며 “주한대사로 재임중엔 인권과 민주화를 지지하는 미국의 목소리를 강화하는 데 도움을 줬고, 극적인 결과도 가져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중 간에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주중대사를 지내면서 인권을 옹호하고 미국민의 안전을 확보했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조지 H.W 부시 전 미 대통령은 “릴리 전 대사는 탁월하게, 그리고 영예롭게 대사직을 수행한 가장 유능한 대사였다”고 별도의 성명을 냈다.

워싱턴=최상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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