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는 부적이다, 왕실부터 서민까지 누구나의 희망 담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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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호 08면

강원도 영월 하고도 외진 김삿갓 계곡에 조선민화박물관이 있다. 영월 읍내 공기만도 기가 막힌데 더 깊은 그곳에선 숨 쉬는 일 자체가 황홀하다. 미송으로 지은 박물관의 솔 향에 먼저 취한 뒤 눈이 호사를 누린다. 민화 중에서도 익숙한 ‘까치 호랑이’부터 왕실에서 두고 본 구운몽 병풍, 현대 작가들이 그린 작품, 별실에 마련한 19세 미만 관람불가 춘화도까지 줄줄이다. 오석환(55) 관장이 그림 설명에 나선다.

이경희 기자의 수집가 이야기 - 오석환 조선민화박물관 관장

“민화는 감상용이 아닙니다. 바람을 담은 부적입니다. 가령 호작도의 까치는 좋은 소식을 바라는 것이고, 호랑이는 나쁜 것을 물리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나비 100마리를 그린 ‘백접도’는 나비가 상징하는 화합과 부귀 장수의 효과를 100배로 키우는 그림이다. 기러기와 갈대를 그린 ‘노안도’엔 노후에 편안하라는 바람이, 포도 그림엔 자손 번창의 뜻이 담겼다.

“민화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서민의 그림’이 아닙니다. 왕실과 사대부, 여염집 벽장문까지 두루 걸렸던 정통 그림이자 생활 문화였습니다.”
봉황은 제후를 상징하고 용은 황제를 상징한다. 창덕궁 인정전엔 봉황도를, 대한제국 선포 이후 경복궁 근정전에 황룡도를 그린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꽃 중의 꽃 모란 그림은 왕비의 방을 장식했다. 다만 화가의 낙관이 없고 상징성에 따라 반복적으로 그리던 것이어서 미술사에서 오랫동안 홀대받았던 게다.

1 까치 호랑이. 종이에 채색, 110x45㎝. 새해를 맞이해 모든 액운과 잡귀를 막아 주고 기쁜소식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2 어변성룡도. 종이에 채색, 94x57㎝. 물고기가 변해 용이 된다하여 과거 급제와 입신 출세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3 구운몽도(부분). 종이에 채색, 8폭, 사이즈 각 58x28㎝.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의 줄거리를 그린 그림.현존하는 구운몽도 중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 관장은 그림과는 거리가 먼 인천시청의 공업 담당 공무원이었다. 주당이던 그는 10년 폭음 후 위궤양을 앓고 술을 끊었다. “술을 끊으니 남는 시간이 많아 분재와 수석을 했습니다. 수석 연출을 하려고 고가구를 사러 다니다가 우연히 민화에 빠졌죠.”
그냥 그림이 아니라 이야기가 있는 그림이어서 더 좋았다. “민화를 공부하려면 중국과 한국의 역사, 신화는 기본으로 알아야 합니다. 책을 많이 읽었지요.”

그러던 1996년, 20년 넘게 다니던 공직에서 떠났다. “직장에 다니는 이유를 모르겠더군요. 공무원으로 멋있게 잘 살았지만 앞으로의 삶을 거기에 다 맡기면 죽을 때 후회할 것 같았어요.” 아내에게 고민을 털어놨더니 “그렇다면 당신은 불행한 사람”이라며 사표를 쓰라고 했단다. 우연히 아내와 영월에 내려왔다가 김삿갓 계곡에 지천으로 널린 산딸기를 실컷 따 먹었다. 아내는 그에게 “시골 생활을 싫어하지만 이런 곳이라면 살 수 있겠다”고 말했다. 4년 준비 끝에 2000년 개관했다.

직장을 그만둘 때 동료들은 “박물관은 은퇴 후 열어도 된다”며 뜯어말렸다. 그러나 그는 10년 더 일찍 사표를 쓰지 않은 걸 후회한다. “관장의 의지만 있으면 박물관을 살려 낼 수 있습니다. 열정이 있어야 해요. 10년 일찍 시작했다면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그도 처음엔 “집 짓고 살면서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펼쳐 놓고 보여 주자”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러나 박물관은 사적인 공간이 아님을, 관람객이 감동과 배움을 얻는 곳이어야 한다는 걸 금세 깨달았다. 영월에는 박물관이 19개나 된다. 조선민화박물관은 그중 가장 먼저 해설을 시작했다. 박물관을 연 이듬해, 관람객 하나가 “볼 것도 없는데 왜 돈을 받느냐”며 시비를 걸었다. 참다 못한 그는 “네가 보는 눈구멍이 없어서지!”라며 멱살잡이까지 했다. 보는 눈이 없으면 가르치는 수밖에. 그래서 관람객이 몇 명이 오든 해설을 했다. 관람객의 요구에 따라 4시간30분간 설명한 적도 있단다.

유물도 더 구입하고 박물관도 확장했다. 현재 박물관 소장 민화는 3500여 점에 달한다. 뒤편에 야생 화원도 만들었다. 과거에 합격해 출세한다는 뜻을 담은 ‘어변성룡도’를 수험생용 부적으로 만드는 등 민화를 활용한 문화상품도 꾸준히 개발했다. 서울에서 빨라야 3시간30분 거리에 있는 이곳에 연간 3만8000명이 찾아온다. 그러나 부업으로 번 돈까지 박물관에 투자하고도 그림 빚만 수억원이란다.

“아내에게 이 그림들은 당신 것도, 내 것도 아니라고 얘기했어요. 단 한 점도 팔아 본 일 없고요. 재단법인을 만들어 유물엔 아무도 손 못 대게 할 겁니다. 그러나 나 죽고 나서 누가 이 산중에서 고생할까를 생각하면 속이 타요. 박물관만으로도 먹고살 수 있게 만들어 놔야 누군가가 맡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야죠.”


중앙일보 10년차 기자다. 그중 5년은 문화부에서 가요·방송·문학 등을 맡아 종횡무진 달렸다. 사람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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