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駐韓 외국지사장 '몸값' 비싸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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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외국 비즈니스맨 사이에 '서울 근무는 곧 무덤' 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았었다. 한국 근무를 끝으로 옷을 벗거나, 탈출에 성공한다 해도 수평이동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그만큼 외국 기업가들이 꺼리던 지역 중 하나였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넘기면서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매출규모나 수익에서 다국적기업의 변두리 시장에 불과했던 한국이 이제 노른자위 지역으로 부상한 것. 특히 한국에서 근무한 외국기업 지사장들이 잇따라 발탁.승진되면서 엘리트 간부들이 서울 근무를 자원하는 경우도 늘었다.

한국 피자헛의 조인수(47)사장은 트라이콘 인터내셔널 본사의 국제부문 마케팅을 총괄하는 수석 부사장으로 31일 발탁됐다. 이 회사는 피자헛.켄터키 프라이드 치킨(KFC)등을 계열사로 거느린 세계적인 외식업체. 브라질 교포 출신으로 1989년 한국 P&G에 파견된 조사장은 97년 한국 피자헛으로 옮긴 뒤 3년 만에 3단계 수직 상승했다.

트라이콘 인터내셔널측은 "조사장은 외환위기로 매출이 급감하는데도 본사 경영진을 설득해 한국 투자규모를 늘린 당사자" 라며 "지난해 한국의 경기회복과 맞물려 한국 피자헛이 막대한 수익을 거둔 것이 최고 경영진에 깊은 인상을 주었다" 고 밝혔다.

홍콩상하이은행(HSBC)의 제프 캘버트 전 한국본부장도 위기를 기회로 삼아 도약한 인물. 한국의 5개 지점을 맡아온 그는 영국의 스코틀랜드와 북부지역의 4백여개 지점을 총괄하는 책임자로 지난 16일 자리를 옮겼다.

HSBC 관계자는 "캘버트본부장은 외환위기로 금융권이 어려움을 겪던 98년 말 한국 소매금융 시장에 진출해 영업기반을 넓히고 탁월한 수익을 냈다" 며 "그의 강력한 추진력이 최고경영진의 깊은 신뢰를 끌어냈다" 고 밝혔다.

이에 앞서 프랑스계 은행인 소시에테 제네랄(SG)의 서울지점 알랭 베리사르(53) 지점장도 98년 9월 중국.한국.홍콩.대만을 총괄하는 최고 경영자(CEO)로 발탁됐고, 미국 시카고은행의 마이크 브라운(40)서울지점장도 같은해 8월 아태본부장으로 전격 승진했다.

주한 미국 상공회의소 관계자는 "본사 경영진들은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한국 지사장의 위기관리 능력에 주목하고 있다" 며 "90년대 초반 중남미 경제위기 이후 멕시코 지사장들이 대거 승진한 것과 같은 맥락" 이라고 설명했다.

고상민 SG부지점장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한국 금융시장이 완전개방형으로 바뀐 덕분" 이라며 "외국 금융가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일본.중국보다 한국 근무경험에 대한 메리트가 높아지고 있다" 고 말했다.

규제가 없어지면서 한국지사의 매출액이 급신장하고 중국시장과 인접한 지역적 중요성이 부각된 것도 한국 근무가 각광을 받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을 아시아 생산거점으로 삼는 다국적기업이 늘어나고 한국법인의 역할이 판매에서 생산.연구기술 개발까지 확대되고 있다.

한국 3M㈜의 폴 D 러소(53) 지사장은 한국을 생산거점으로 삼아 도약한 대표적인 인물. 96년 1월에 부임한 러소지사장은 지난해 11월 미국 본사의 의료제품 사업을 지휘하는 총괄본부장으로 영전했다.

부임 당시 1천9백70억원이었던 매출이 외환위기를 겪은 98년에는 1천7백60억원으로 줄었는데 99년에는 2천6백억원으로 급증했다. 한국 3M 관계자는 "러소 지사장은 구조조정으로 생산성을 높이고 공격적 마케팅으로 판매를 늘렸다" '며 "본사에서 한국지사를 아시아의 모범 경영 사례로 선정한 것이 승진에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고 말했다.

프랑스계 화장품 회사인 로레알 코리아의 마탱 기유 전임 지사장도 지난해 10월 계열 화장품 브랜드인 '저메이(germay)' 의 프랑스 영업을 총괄하는 총 책임자로 승진했다.

기유 전 지사장은 93년 6월 지점을 설립한 이후 6년만에 화장품은 물론 향수에서도 경쟁업체들 따돌리고 백화점 매출 1위를 기록했으며, 지난해에는 전년 대비 65%의 매출성장을 기록했다.

표재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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