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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국가위기 유형에도 대비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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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광복 후 한국은 전쟁이나 정변 등 수많은 국가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면서 국제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국가 제도가 거대화되고, 새로운 시대의 물결에 따라 국제화와 정보화가 추진되면서 이전에는 고려되지 않았던 새로운 위협요인들에 직면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2003년 2월에 발생한 대구지하철 참사사건과 같은 인위적인 재난이 고속철도 등에서 발생한다면 그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세계 유수의 정보대국으로 성장했지만 올 6월의 국가 기간 전산망에 대한 해킹사건처럼, 제3국의 해커들이 국가전산망이나 금융전산망에 침투해 정보체계를 교란시키는 사태가 벌어질 경우 통신.금융대란이 벌어져 일반 시민들의 일상생활에도 막대한 피해가 발생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현대사회에서 국가 위기관리는 전통적인 안보의 범주에 한정돼서는 안 된다. 정치.경제.사회.문화체계 등 국가의 핵심 요소나 가치에 중대한 위해가 가해진다면 그것이 더욱 치명적인 국가위기일 수 있다.

국가적 위기의 예방과 관리에 정부기관과 일반 시민들이 별개일 수 없다. 미국이 9.11 이후 국토안보부를 설치해 위기관리체제를 강화하고, 일본도 탈냉전 이후의 위협요인에 대해 관련 법제를 정비하고 위기관리청 신설까지 검토하고 있는 것은, 위기 예방과 위기관리의 과제들이 주요 각국의 보편적인 과제가 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군인 출신들이 대통령을 지내던 시기에는 이들 국가 최고지도자 스스로 위기관리에 대한 전문가적인 식견을 갖고 있다고 자부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국가체제의 정비 문제를 절실한 과제로 인식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민간인 출신 대통령들이 선출되면서 국가위기에 대한 예방과 관리를 국가지도자 개인의 관심과 능력에 의존하기보다 정부 시스템에 의한 관리로 전환하고자 하는 노력이 나타났다.

지난 정부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상설화되고, 현 정부 들어 NSC 내에 위기관리센터를 신설하는 등 인원이나 조직 면에서 강화되고 있는 점은 그런 면에서 바람직한 정책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NSC 위기관리센터가 국가위기관리 기본지침과 유형별 위기관리 표준 매뉴얼을 작성하려 하고 있다. 시의적절한 일이다.

그러나 위기관리 관련 지침과 매뉴얼의 작성은 보다 안전하고 평화로운 국가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의 첫걸음에 불과하며 여기에는 단순한 자연.인공재해, 테러 관련 문제뿐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 등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적극적인 예방외교와 어젠다 제시를 통해 위기발생을 원천 봉쇄하는 것과 같은 외교안보 이슈도 들어가야 한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서해 북방한계선(NLL) 우발사태, 지진과 풍수해, 원유 수급 및 사이버 안전분야 등 30여개 위기 유형은 우리가 매뉴얼화해 '예방-대비-대응-사후관리'의 대비책을 마련할 수 있는 것들로 보고 있다.

국가 위기란 평시 예측하지 못한 분야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새로운 위협요인에 대한 지속적 관심과 이를 추가로 매뉴얼화할 수 있도록 조직과 사고를 유연화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또한 매뉴얼 작성만이 아니라 범정부 차원의 협업시스템이 제대로 가동될 수 있도록 사고의 패러다임도 바꾸어야 한다.

박영준 국방대학교 안보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