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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경제학] ④ 사업 겸업 음악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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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런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는 '피아노의 아버지' 가 잠들어있다. 로마 태생으로 15세때 영국으로 건너온 무지오 클레멘티(1752~1832)다.

피아노 교재로 사용되는 '소나티네' 의 작곡자인 그는 피아노 레슨.피아노 제조업.악보출판에 손을 대 엄청난 돈을 벌었다.

모차르트와 함께 요제프 2세 어전에서 피아노 경연을 벌일 정도로 뛰어난 연주솜씨를 자랑했으나 40세때부터 연주를 중단하고 사업가로 변신한 것.

사업 자금은 레슨에서 나왔다. 하루에 16명의 학생을 가르쳤다고 한다. 학생수를 절반으로 줄이고 연간 2백일을 가르쳤다고 해도 연간 수입은 1천6백80파운드. 작품료 등을 보태면 2천파운드가 넘는다. 당시 쇠고기 값이 1파운드(4백53.6g)에 5페니. 집세를 보탠 생활비는 5백파운드 정도였다.

1798년 파산 직전에 있는 출판업자겸 악기상인 존 롱맨과 동업해 당시 최고이던 브로드우드에 버금가는 피아노 회사로 키워냈고 영국 진출을 꿈꾸던 베토벤과 악보출판 계약을 맺어 '피아노협주곡 제4번' '바이올린협주곡' '코리올란 서곡' '교향곡 제4번' '라주모프스키 4중주' 를 한꺼번에 사들였다.

'녹턴(야상곡)' 의 창시자로 알려진 클레멘티의 제자 존 필드는 스승과 함께 유럽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클레멘티사가 제작한 피아노의 우수성을 홍보했다.

모차르트는 그를 가리켜 '물건이나 잘 파는 속물' 이라고 비난했다. 영국에선 기업 경영이 상류사회로 진입하는 지름길이었지만 유럽 대륙에서는 사업가로 진출한 예술가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마치 성직자가 교회용품 판매상으로 변신하는 것처럼. 클레멘티는 러시아 연주여행 도중 호텔 객실에서 직접 빨래를 할 정도로 구두쇠였다고 한다.

1807년 런던 토텐햄 코트가에 있는 클레멘티사에 화재가 발생해 4만파운드 상당의 손해를 입었다. 보험료는 1만5천파운드만 지급되었다. 하지만 클레멘티 소유의 악보출판사가 이윤을 많이 남기는 덕분에 그는 피아노회사를 다시 일으켰다.

산업혁명으로 일찍부터 중산층이 발달한 런던은 19세기초 유럽 최고의 음악시장이었다. 클레멘티는 이곳에서 피아노.레슨.악보를 모두 팔았다.

악기상.출판업자를 겸했던 또 다른 음악가는 작곡가 클라라 슈만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1785~1873).

피아니스트였던 그는 레슨도 하면서 피아노 제조회사를 설립했고 음악도서관을 만들어 악보임대 수입을 올렸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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