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셔틀콕 여왕 라경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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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쏟은 땀이야 다를 바 없지만 올림픽 금메달과 동메달은 하늘과 땅 차이다. 귀국 후 환영 인파와 언론 조명, 포상금까지-.

김동문(29)이 삼성전기 구단 환영식에서 금메달 포상금 1억원을 받고 있던 지난 7일 오후 5시, 라경민(28.대교눈높이)은 한국체육대학 체육관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셔틀콕을 쳐 넘기고 있었다. 아테네 올림픽 배드민턴 혼합복식에서 확실한 금메달이라던 이들은 8강전에서 무너졌다. 외국 기자들이 일제히 "믿을 수가 없다(Unbelievable)"고 되뇔 만큼 충격적인 '이변'이었다. 다행히 김동문은 하태권(삼성전기)과 짝을 이룬 남자복식에서 금메달을 쥐었다. 그러나 라경민은 후배 이경원(삼성전기)과 출전한 여자복식에서 동메달을 따는 데 그쳤다.

"오빠(김동문)한테 섭섭한 마음 없어요. 아쉽긴 해도 지금은 아무 생각 없어요."

귀국 후 일주일 동안 언론을 피해 있었던 라경민이 입을 열었다. 서울 광진구 광장동 대교눈높이 선수단 숙소에서 만난 그는 오후 훈련 탓인지, 마음 고생 탓인지 피곤한 기색이었다. 말도 아꼈다. 서늘한 음성엔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듯했다.

그는 10일 개막하는 가을철 실업연맹전에 출전하기 위해 지난 6일 라켓을 다시 잡았다. 그동안 자동차를 몰고 국내 곳곳을 돌며 머리를 식혔다고 했다. 많이도 울었지만 1996년과 2000년에 이어 또다시 금메달 문턱에서 좌절한 아쉬움은 여전한 듯했다. 그 많은 세계선수권.아시안게임 우승컵과 올림픽 은메달(96년).동메달(2004년)도 위안이 되지 못했다. 라경민은 "올림픽 금메달은 내게 인생의 전부였다"는 말로 응어리진 아쉬움을 토했다.

"아테네로 출국하기 전에 선수촌에서 짐도 다 뺐어요. 13년을 (국가대표로) 지냈으니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은데…."

말끝을 흐리는 그의 고민은 배드민턴 대표팀 전체의 고민이기도 하다. 한국 여자 배드민턴의 대명사나 다름없이 군림해온 세월. 그를 대체할 재목을 찾기 쉽지 않다. 그의 여자복식 파트너였던 이경원은 "경민이 언니 결정을 기다리겠다"며 잔류에 대한 희망을 비쳤다. "일단은 10월 전국체전 준비에만 집중하려고 해요. 대표팀 은퇴 등 모든 건 그때 결정할래요."

금메달을 딸 경우 포상금을 최대 3억원까지 생각했던 대교 측은 라경민에 대한 대우 문제로 고민 중이다. 서명원 대교 감독은 "본인이 선수 생활을 원하는 만큼 내년 3월 선수 겸 트레이너로 발령낼 예정"이라고 전했다.

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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