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쉬리' 와 '간첩 리철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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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스파이소설이라면 대개 심심풀이 읽을거리 정도로 생각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스파이소설은 상황의 긴장감에 몰입하는 재미를 줄 뿐 문학적 가치를 진지하게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본격문학과는 거리가 있다.

여기에도 물론 예외는 적지 않다.

특히 1970년대 이후 본격문학의 울타리가 느슨해지면서 종래 문학의 변방으로 여겨지던 탐정소설.공상과학소설.스파이소설 등의 분야에서도 진지한 평가를 받는 작가들이 많이 나타났다.

스파이소설 분야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존 르 카레였다.

영국 해외첩보국(MI-6)을 모델로 한 십여편의 르 카레 작품은 스파이소설의 긴장감과 재미를 가졌으면서도 인간성의 천착이라는 본격문학의 과제에 충실하다.

그의 작품세계를 다룬 평론서도 여럿 나와 있고 그의 전기는 권위를 자랑하는 트웨인 영문학작가총서에 들어 있다.

10년 전 많은 르 카레 팬들은 걱정에 휩싸였다.

냉전 종식으로 스마일리(르 카레 소설의 주인공)가 무대를 잃을 것을 걱정한 것이다.

르 카레는 한 인터뷰에서 팬들을 안심시켰다.

"스마일리는 냉전 덕분에 존재한 특별한 인간이 아니고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인간입니다.

나 역시 냉전 덕분에 존재한 작가가 아닙니다. "

르 카레는 90년대에 네 편의 소설을 발표했다.

스마일리는 퇴장하고 스파이전의 무대도 사라졌지만 이 소설들의 배경으로 남아있다.

많은 팬들은 이 변화로 르 카레의 진면목이 더욱 빛나게 되었다고 반긴다.

최후의 냉전지대로 남아 있는 우리 사회에도 '간첩' 의 이미지가 적지않게 변했음을 근래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에서 살필 수 있다.

'쉬리' 와 '간첩 리철진' 이 그런 예다.

'쉬리' 의 간첩들은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그 나름의 휴머니즘을 가진 인간들이다.

'악마의 졸개' 로서 일체의 인간미를 부정당했던 종래의 간첩들과는 다르다.

'리철진' 의 고정관념 파괴는 더 철저하다.

정보화시대의 사양산업으로 첩보업무를 풍자하듯, 간첩도 대공요원도 모두 '보통사람' 이다.

'쉬리' 는 고정관념의 본질을 지키며 휴머니즘을 덧칠한 정도인 데 비해 '리철진' 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역할을 간첩에게 맡겼을 뿐이다.

정보화시대일수록 정보의 방어는 더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인터넷과 전자신문이 범람하는 요즘 세상에 첩보전의 현장은 보통사람들 곁에서 떠나고 있다.

'지금 당신 곁에도…' 식의 상투적 광고를 지하철에 도배하는 국정원 담당자들은 간첩영화를 부담없이 보고 즐기는 관객들 만큼도 이 변화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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