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3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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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37) 탱크부대 출장

나는 서둘러 청와대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오원철(吳源哲.72)대통령경제2수석은 몹시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날 오전 과학기술처 연두순시에서 일어난 해프닝 때문이었다.

그는 불만스런 목소리로 당시 상황을 내게 설명했다.

조순탁(趙淳卓.96년 작고)한국과학원(KAIS)원장이 박정희 대통령께 '국방과학연구소(ADD)로부터 연구 용역비를 받아 KAIS가 탱크의 자동조준장치를 개발했노라' 고 보고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朴대통령은 포병 출신답게 탱크의 명중률과 목표물과의 거리측정 시간 등을 꼬치꼬치 캐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趙원장을 비롯, 자동조준장치 개발 책임자인 박송배(朴松培.76.한국과학기술원 명예교수)교수 등 그 자리에 있던 어느 누구도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분위기가 매우 어색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특히 방위산업을 총괄하고 있던 吳수석은 KAIS가 탱크의 자동조준장치를 개발한 사실조차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 남았다.

吳수석은 아직도 화가 덜 풀렸는지 볼멘 목소리로 내게 지시했다.

"韓박사가 말이야, 일선 탱크부대에 직접 가서 현재 우리 군이 쓰고 있는 탱크의 성능을 정확하게 조사해 봐. 그리고 이번에 ADD와 KAIS가 각각 개발한 레이저 거리측정기와 자동 조준장치를 탱크에 장착할 경우 탱크 성능이 얼마나 개선될지도 알려 주게. "

吳수석의 얘기인즉, 레이저 탱크사격 통제장치 개발로 탱크 성능이 얼마나 향상될지 기존 탱크와 비교해 구체적으로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레이저 거리측정기와 자동 조준장치는 레이저 탱크사격 통제장치의 핵심 부품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음날 아침, 중부전선에 있는 탱크부대를 찾아갔다.

1979년 1월 중순이었다.

전방이어서 그런지 날씨가 몹씨 매서웠다.

부대에 이틀간 머물며 기존 탱크의 성능에 관한 정확한 데이터를 수집했다.

나는 직접 탱크 안에 들어가 포수(砲手)와 함께 거리측정과 사격실험을 반복했다.

마침내 실험 결과가 나왔다.

거리측정에서 자동조준까지 대략 10~15초가 걸렸다.

또 명중률은 3㎞ 떨어진 거리에서는 고작 30~40%에 불과했다.

레이저 탱크사격 통제장치를 장착할 경우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레이저로 목표물과의 거리를 측정하는 데는 불과 10만분의 1초 밖에 걸리지 않는다.

또 목표물을 자동조준하는 데 0.1초면 충분했고 명중률도 80% 수준이었다.

수없이 반복된 모의실험에서 밝혀낸 사실이었다.

나는 지체없이 청와대로 향했다.

吳수석은 이틀만에 조사를 끝마친 데 대해 다소 놀라는 눈치였다.

나는 실험 결과와 앞으로 레이저 탱크사격 통제장치를 장착할 경우 탱크 성능이 얼마나 향상될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내 보고가 끝나자 吳수석은 "미국제 탱크의 명중률은 어느 정도지□" 하고 내게 물었다.

나는 "90% 정도는 된다" 고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러자 "음, 90%라…. 우리 탱크와 별 차이 없겠네" 하며 흐믓해 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우리가 개발한 레이저 탱크사격 통제장치는 대당 생산 비용이 얼마나 들 것 같냐?" 고 물었다.

내가 "3만 달러 정도" 라고 하자 곧바로 "미국제 레이저 탱크사격 통제장치는 값이 얼마냐□" 고 재차 물었다.

나는 주저없이 "50만 달러" 라고 답변했다.

만족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보름후 吳수석이 나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한 말을 전해 줬다.

"내가 레이저 탱크사격 통제장치에 대해 대통령께 보고 드렸더니 아주 기뻐하시더라구. 그러면서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바로 그런 것을 만들어야지' 하며 자네 신상에 관해 묻더군. "

그 말을 듣는 순간 왠지 겸연쩍었다.

수년간 밤을 지새우며 일한 우리 연구원들의 노력이 어우러져 일궈 낸 결과였기 때문이다.

한필순 전 원자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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