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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김종수의 시시각각

“통일은 산사태처럼 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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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20년 전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감격에 겨워 전한 베를린 장벽의 붕괴 소식이다. 1985년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개혁과 개방을 천명한 이후 냉전체제의 종식은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그러나 정작 냉전을 끝낸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실로 우연히 벌어진 엉뚱한 실수에서 비롯됐다.

89년 고르바초프는 개혁·개방의 원칙이 동구의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도 적용된다고 밝혔다. 동구권 국가들에서 체제 전환 움직임이 일어나더라도 소련이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해 여름 헝가리가 이웃인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하자 동독인 20여만 명이 국경을 넘어 서방으로 탈출했다. 놀란 동독 정부가 황급히 단속에 나서자 동독 주민들은 연일 여행 자유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운명의 11월 9일 동독 정부는 여행 규제를 일부 고치기로 했다. 그러나 수정 내용은 여권 발급 기간을 단축한다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날 저녁 동독 공산당 대변인 귄터 샤보브스키가 기자회견을 열어 이 내용을 발표하던 중 한 이탈리아 기자가 시행 시기를 물었다. 그는 엉겁결에 대답했다. “내가 아는 한, 지금 즉시 유효하다.”

독일어에 서툰 이탈리아 기자는 이를 ‘즉시 여행 자유화를 실시한다’는 뜻으로 잘못 알고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세계적인 특종기사(?)를 타전했다. 그러자 미국 기자들도 덩달아 비슷한 기사를 내보냈고, 서독 TV방송이 이를 받아 “동독이 드디어 국경을 개방했다”고 보도했다. 뉴스를 시청한 동독 주민들은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갔다. 동독 국경수비대가 주민들을 막아섰지만 “국경이 개방됐다는데 무슨 짓이냐”는 항의에 머쓱해져서 길을 터주고 말았다. 몇 명이 장벽을 타고 넘어가자 일부 주민들은 아예 망치를 들고 나와 본격적으로 장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베를린 장벽은 그렇게 어이없이 무너진 것이다. 그로부터 1년 만에 독일은 통일됐다.

독일의 통일은 이렇듯 아무런 각본 없이 이루어졌다. 물론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독일 통일을 이끌어낸 역사적인 동력은 이미 축적되어 있었다. 그러나 장벽의 붕괴라는 역사적 사건 자체는 우연한 실수에 의해 돌발적으로 일어났다.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은 분단지역 한반도에도 통일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작은 사건에서 시작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일단 통일을 향한 거대한 움직임이 시작되면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될 것이다. 통일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온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2006년 저서에서 “통일은 산사태처럼 온다”고 갈파했다. 통일을 향한 역사의 흐름은 스스로의 관성에 따라 산사태처럼 밀어닥칠 것이라는 얘기다. 그 발단은 북한의 급변사태다. 어떤 원인에 의해서든 북한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지면 주민들의 탈북 러시와 함께 한반도 전체가 산사태에 휩쓸리고 동북아의 국제정세는 격랑의 소용돌이에 빠질 것이다. 세계 3위의 경제력을 가지고 착실하게 대비했던 독일도 급작스럽게 닥친 통일에 극심한 경제적 고통과 사회 혼란을 겪었다. 한반도에 들이닥칠 통일의 산사태는 그보다 몇 배의 충격과 혼란을 불러올 것이다. 준비 없이 맞이하는 통일의 산사태는 그야말로 재앙이 될 우려가 크다.

그러나 재앙을 피할 수 없다고 해서 손을 놓을 수만은 없다. 언젠가는 산사태가 일어날 것임을 안다면 최대한 대비해서 피해를 줄여야 한다. 정치 지도자와 정부는 물론 국민 각자도 예상치 못한 통일의 산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대비해야 한다.

메르켈 총리는 9일 “장벽 붕괴는 독일 현대사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우리는 과연 통일 20년 후에 즐겁게 이런 회고를 할 수 있을까.

김종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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