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주머니 넣고 다니다 아무때나 찰칵 '로모 열풍'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눈높이를 엉덩이쯤에 맞춰라. 다른 세상이 열린다." 얼핏 자극적으로 들리는 이 말은 '로모족(族)' 의구호다.

로모(LOMO)는 손바닥 만한 크기의 소형 카메라 이름. 겉으로 봐선 불꽃튀는 카메라 시장의 격전에서 결코 살아남을 것 같지 않은 평범한 제품이다.

그런데 이 조그만 카메라 하나가 최근 10여년간 세계에 '로모 열풍' 을 일으키며 젊은이들의 문화로 자리잡고 있다. 국내에도 최근 PC통신 하이텔에 '로모이즘' (sg2159)이라는 소모임이 생겼을 정도다.

로모에서 파생된 말만 해도 로모그래피(로모로 사진 찍기), 로모그래퍼(로모로 사진 찍는 사람), 로모그래픽 소사이어티(로모를 가진 사람들의 모임), 로모 월(로모로 찍은 사진을 부착하는 벽), 로모 사피엔스(언론에서 로모족에 붙인 별칭)등 수십 가지에 이른다.

로모의 특징은 플래시 없이 자동으로 노출이 정해져 야간에도 미세한 움직임을 잡아낼 수 있다는 점. 또 대상은 환하게, 주변부는 어둡게 나와 낡고 오래된 느낌의 사진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로모의 진정한 매력은 찍는 방식의 자유로움.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니다 아무 때나 '찰칵!' 찍는 짜릿한 맛에 있다. '보는 순간 셔터를 누르고 그 다음엔 궁금해하지 마라' 는 것이 로모그래퍼들의 좌우명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사진은 일체의 격식이 없다. 물체가 이지러지거나 흔들리거나 하는 것은 예사. 마치 '몰래 카메라' 처럼 남의 손바닥이나 발, 뒤통수 등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빠르게 찍기, 그리고 훔쳐보기' 다. 장난꾸러기의 마음을 가지면 된다. 필름도 일반 필름을 사용한다.

로모는 1980년대초 구 소련 KGB에서 스파이용으로 개발됐다. 4백50여개에 달하는 부품을 일일이 사람 손으로 조립해야 하는 이 '애물단지' 는 90년대 들어 생산이 중단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서광이 비친 것은 91년. 오스트리아 대학생 마티아스 피글은 체코 프라하의 한 고물상에서 먼지 더미에 쌓인 로모를 발견해 비엔나로 가져왔다. 친구들은 금새 엉덩이에 카메라를 붙이고 마음대로 찍어대는 피글의 모습에 반했다.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건너가 폐업하려는 공장장을 설득해 세계 독점 공급권을 따냈다. 로모 가격은 2백불(국내 가격 24만2천원). 룸메이트와 함께 로모그래픽 소사이어티라는 회사를 차리고 '로모 문화' 를 전파하는 '대사관' 을 세우기 시작했다.

현재 독일.오스트리아.이집트.일본 등 30여개국에 대사관이 있으며 이용자는 약 6만명으로 추정된다. 한국에는 지난해 11월 허수돌(26.광운대 전자공학과)씨가 '대사' 로 '취임' 했다(http://www.lomo.co.kr). 현재 회원은 70여명. 각국의 대사는 대사관이 생기면 1년 내에 로모 사진전을 열어야 한다.

'로모 월' 을 세우는 것이다. 또 '로모 월' 앞에서는 카메라를 무료로 빌려주고 찍어온 사진을 즉석에서 현상, 전시해주는 이벤트도 벌어진다. '카메라 왕국' 이라는 일본에서는 지난해 패션지 '논노' 11월호에서 '젊은이들이 갖고 싶어하는 상품' 1위로 로모를 꼽았다.

가벼움과 장난스러움, 로모의 이런 매력이 우리 나라에서도 통할까. 아니면 폴라로이드 카메라처럼 '반짝 인기' 에 그칠까.

기선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