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적평가제 정착 달라진 교수사회] 예능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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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A대 기악과 K교수(55.첼로)는 학기말이 다가오면 연구실적보고로 골머리를 앓는다.

요즘엔 자비를 들여 독주회를 하지 않으면 1백점 만점인 실적점수를 쌓을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공연장 대관을 따내 제자.친지들로 객석을 채우는 일도 번거롭지만 나이가 들어 악보 외우는 일도 힘겹고 손가락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게 더 큰 문제다.

5백만원이 넘는 비용도 아깝지만 제자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차라리 음악에 관한 논문을 한 편 써서 학술지에 게재할까 생각도 해보지만 그것도 만만찮다.

교육부에서 인정하는 학술지의 지면은 한정돼 있으니 경쟁이 치열하다.

예술계 교수들은 평가기준이 복잡하다.

음악.무용계 학과의 경우 개인 발표회는 1백점, 오케스트라 협연은 80점, 2인 무대는 50점, 3인 이상이 참가하는 공연은 30점이다.

공연장소로는 국내보다 해외가, 반주는 성악곡보다 기악곡이 점수가 높다.

그래서 국내 무대에 서서 실력이 탄로나기보다 차라리 동구권의 무명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게 낫다는 계산도 나온다.

공연장에 따라서도 점수가 달라진다.

연구발표회 성격인데도 굳이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을 고집하는 이유다.

그래서 교수들은 강사.교수 임용을 준비하는 젊은 연주자들과 치열한 대관 경쟁을 벌인다.

비싼 돈을 들여 독창회를 하느니 오페라에 무료 출연하는 쪽을 택하는 성악가들도 없지 않다.

문제는 이런 기준으로는 '연구실적' 을 제대로 평가하기 어렵다는 것. 홍승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CD녹음도 자비(自費)를 들여 만드는 경우도 있는 만큼 현재의 양적인 평가기준으로는 질적인 평가가 불가능하다" 고 말한다.

미술분야는 교수가 작가라면 연구 업적을 전시회 개최 횟수로 평가한다.

점수는 해외전 2점.국내 개인전 1점.국내 그룹전 0.5점이 된다.

최근 홍익대.경원대 등은 자비로 여는 대관전은 업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등 기준을 강화하고 있다.

또 홍익대는 이론분야는 의무적으로 논문을 2년에 1편을 발표하게 했던 것을 최근 1년에 1편으로 강화했다.

그러나 대부분 대학은 초대전과 대관전을 차별하지 않기 때문에 상당수 교수가 업적 평가 직전인 11~12월에 급히 화랑을 빌려 전시회를 연다.

연말에는 이런 교수 발표전 때문에 일반 작가들이 서울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열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이장직.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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