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트는 '여성주권 시대'] 나는 이렇게 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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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저 사람 여자 관계가 복잡해. " 바람기가 있는 사람을 우리는 보통 그렇게 표현한다.

그런데 정말로 복잡한 것일까? 그런 경우 문제가 되는 이성 관계는 많아야 기껏 5명을 넘기가 어렵다. 따라서 그의 여자 관계는 복잡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단순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남녀 관계는 너무 단순한데 문제가 있다. 단순하다는 것은 우선 관계를 맺고 있는 이성의 양을 말한다.

직장 생활을 하는 남자들의 수첩을 열어 전화번호부를 뒤져보자. 명함통을 확인해보자. 여 성의 이름이 얼마나 되는가.

단순하다는 것의 또 한가지 의미는 관계의 내용이다. 남녀 관계는 상하의 위계질서로 고정되어 있고, 성적인 것을 매개로 획일화되어 있다.

그 틀에서 벗어난 관계는 매우 피상적으로 밖에 형성되지 않는다. 남자들은 자신의 권력이 애매해지거나 소멸 또는 역전되는 이성 관계에 지극히 미숙하다.

반면 여성의 인격을 성욕의 대상으로 치환해버리는 데는 너무 숙달되어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여성들은 섹시한 매력 이외의 능력으로 자신의 사회적인 입지를 마련하기가 대단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미디어는 여성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선정적으로 물신화시켜가도록 자꾸만 종용한다.

지금 남성과 여성 사이에 풀어가야 하는 문제는 크게 두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사회적 경제적 자원이나 권력을 공정하게 배분하는 것으로, 취업 기회와 승진 및 보수 그리고 가정 내에서의 법적인 지위 등이 이에 해당한다.

다른 하나는 여성을 동등한 인격적 주체로 인정하고 대우하는 윤리적 풍토로서, 가정 내에서 폭력이나 직장 내에서 성희롱 그리고 매매춘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법과 제도의 틀이 계속 다듬어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갈등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논쟁이 당장의 이해득실을 염두에 둔 집단 이기주의 또는 그것을 이용한 정치적 게임으로 왜곡되어서는 곤란하다.

긴 안목으로 우리 사회전체의 역량을 최대화하는 방향에서 역동적인 진보를 꾀해야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어떠한 남녀 관계를 구현해갈 것인가에 대한 비전이 공유되어야 한다.

서로를 소비적으로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적인 힘으로 삶의 의지를 북돋아주는 자리에서 남자와 여자는 새롭게 만날 수 있을까. 21세기 우리 사회의 과제이다.

김찬호<연세대 사회학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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