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2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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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27) 원점서 다시 시작

나는 김성진(金聖鎭.69.전 과기처장관.육사11기)국방과학연구소(ADD) 부소장에게 "한가지 조건이 있다" 고 말했다. 金부소장은 내가 조건부로 탄약개발부장을 맡겠다고 하자 반색을 하며 "무슨 조건이냐" 고 물었다.

부장직을 맡느냐 마느냐를 놓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벌이다가 그 문제가 일단락되니까 분위기는 한층 부드러웠다. 나는 조건을 얘기했다.

"앞으로 6개월간 벌컨포(砲)문제에 대해 상부에 중간보고를 하지 않겠습니다. 중간보고를 하면 이해 당사자들이 간섭해 작업에 방해가 됩니다. 그러니 상부에서도 이 기간에는 일체 진행상황을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

여기서 '이해 당사자' 란 바로 국방부와 국산 벌컨탄을 만든 풍산금속, 미 공군 탄약 공급회사인 미국의 '오린' 社 등을 말했다.

당시 풍산금속은 오린社로부터 벌컨탄 제조기술과 장비.재료 등 일체를 들여와 벌컨탄을 만들어 국방부에 납품했다. 만약 국산 벌컨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원인이 국산 벌컨탄에 있다면 오린社는 풍산금속에 40억원을 물어 줘야만 했다.

또 풍산금속은 그 돈을 우리 국방부에 배상해야 했다. 당시 40억원은 엄청나게 큰 액수였다. 그러니 이해 당사자들은 자연히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바로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金부소장은 내가 제시한 조건을 듣더니 흔쾌히 '그렇게 하겠노라' 고 대답했다.

77년 6월 초순, 나는 ADD 탄약개발부장에 임명됐다. 레이저 및 야시장비 개발실장만 4년간 하다가 갑자기 생소한 분야를 맡은 나로서는 몹시 부담스러웠다. 남들은 내 속도 모르고 승진을 축하해 주었지만 나는 그런 소리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국산 벌컨포의 문제점을 찾아내기 위해 서둘러 새로운 팀을 구성했다. 역할을 크게 둘로 나눴다. 벌컨포와 벌컨탄 중 어느쪽에 문제가 있는지를 정확히 찾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벌컨포쪽은 홍판기(洪判基.66.전 대영전자공업 사장)ADD 총포 개발부장과 황해웅(黃海雄.60.전 ADD소장.현 한국기계연구원 원장)육사 기계과 교수가 책임을 맡았다.

洪부장은 문제의 국산 벌컨포 제작 책임자로서 '벌컨포의 문제점을 기어이 찾아 내고야 말겠다' 며 자청하고 나섰다. '결자해지' (結者解之)의 차원에서 끝까지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었다. 포에 관한 한 우리나라 최고 권위자이기도 했다.

또 黃교수는 육사 18기로 미국 조지아공대와 매사추세츠대에서 기계공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은 군 출신 과학자로 벌컨포 문제 해결을 위해 특별히 육사에서 ADD 책임연구원으로 스카웃된 인물이었다.

사실 벌컨포는 포 내부의 정밀도가 2/1000~3/1000㎜ 수준은 돼야 했는데 당시 국내 기술수준은 1/100㎜의 정밀도를 겨우 달성한 상태였다.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社가 기술료로 무려 1천만 달러를 요구했기 때문에 위 두사람은 과감하게 독자 기술개발에 뛰어든 것이었다.

벌컨탄 쪽은 ADD 탄약개발부 선임연구원인 소광섭(蘇光燮.55.서울대 물리교육과 교수)박사와 한경동(在美 거주)연구원 등이 책임을 맡았다. 蘇박사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 캔사스대와 브라운대에서 물리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은 이론 물리학자였다.

또 한씨는 서울대 물리학과를 갓 졸업, ADD 기계과를 지원해 당당히 수석을 차지했으며 분석능력이 뛰어났다.

특히 벌컨탄쪽은 지금까지 국산 벌컨탄 제작에 관여했던 사람들을 모두 제외시켰다. 일체의 선입견이 배제돼야만 벌컨탄의 문제점을 정확히 찾아낼 수 있다는 내 나름대로의 판단 때문이었다. 나는 책임자들에게 "철저히 원리에 입각해 객관적으로 접근하라" 고 거듭 지시했다.

작업에 본격 착수한 직후 주한미 군사고문단의 맥클로이 상사(上士)가 내 방에 찾아왔다. 말이 상사지 실제로는 미 정보기관의 상당한 실력자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과학 분야에 너무 박식해 전문가를 뺨칠 정도였다. 그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글= 한필순 전 원자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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