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 인명사전서 출신지·고교 빼 달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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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호 06면

2009년판 법조인대관 김준규 검찰총장란(아래 사진) 에는 2006년판에 있던 출신지역과 고교에 대한 정보가 빠져있다.

지난 9월 초 발간된 2009년판 ‘법조인대관’의 김준규(55·사시 21회) 검찰총장 인물정보란에는 출신지역(서울)과 출신고(서울 경기고)가 빠져 있다. 다른 법조인의 관련 정보는 그대로 실려 있다. 법조인대관은 법률신문이 3년에 한 번 발행하는 법조계의 대표적 인물편람이다. 2006년판에는 실려 있던 두 가지 주요 정보가 갑자기 빠진 건 김 총장의 직접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연일까.

검사 1500명에게 동의서 받은 김준규 검찰총장

김 총장은 취임 일주일 만인 8월 27일 첫 기자간담회를 했다. 이 자리에서 검찰의 문화를 비판했다. 그러면서 “지연과 학연에 얽매이지 않는 검찰 조직문화를 만들겠다. 대검찰청 인사 데이터베이스는 물론이고 법조인대관에서 검사들의 출신 고교와 출신지를 삭제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대검 실무진은 우선 법조인대관에서 출신지와 고교를 빼는 것을 검토한 결과 현실적인 벽에 부닥쳤다. 법조인대관을 만드는 법률신문 측이 “2009년판 법조인대관이 조판 작업 중인 데다 개개인의 정보라서 검찰총장이 요청한다고 들어주기 어렵다”고 한 것이다. 그 후 며칠 뒤 김 총장은 법률신문 측에 자신의 관련 정보 삭제를 요청했다. 검찰총장이 아닌 개인 자격이라는 단서를 달았다고 한다. 법률신문은 검토 끝에 본인의 요청이라 거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결국 전국 검사 1600여 명 가운데 김 총장만 유일하게 지역과 고교 정보가 빠진 채 책이 인쇄됐다.

2009년판 법조인대관(오른쪽)과 2006년판.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후 김 총장의 지시로 전국 검사들을 상대로 한 서명 작업이 시작됐다. 두 달여 동안 검사 1500여 명이 “김 총장과 마찬가지로 법조인대관에서 지역과 초·중·고 학력 정보를 빼는 데 동의한다”는 내용의 요청서에 서명했다. 서명 작업을 마무리한 대검은 지난달 30일 조은석 대검 대변인 명의의 한 장짜리 요청서와 검사들의 서명 명부를 법률신문 측에 보냈다. 요청서에는 “개인 정보가 자칫 잘못 이용될 수 있으며 일부 출신 지역이 정확하지 않은 것도 있다. 인터넷 홈페이지의 인물정보와 법조인대관 정보를 모두 빼 달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법률신문 측은 고심 끝에 일단 인터넷 인물정보를 수정했다. 책의 내용도 수정해 주기로 내부 방침을 정했다고 한다.

법조인대관은 3년마다 발간된다. 법률신문의 한 관계자는 “이번 2009년판은 이미 배포가 끝나 수정이 어렵다. 다음 인쇄판은 2012년에 나오는데 김 총장의 임기는 2011년에 끝난다. 다음 총장이 오면 방침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전망했다.
김 총장의 뚝심이 강했던 것일까, 상명하복의 검찰 조직이라 검사들이 독자적 의견을 내기가 어려웠던 것일까. 조 대변인은 “서명은 검사들이 자유의사에 따라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검사들과 법무부·해외주재 검사 등 100여 명은 연명부에 서명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관련, 대검은 자체 전산망에서 검사들의 출신 고교와 출신 지역을 삭제했다. 하지만 인사를 주관하는 법무부의 전산망에는 예전 기록이 그대로 남아있다. “실효성보다는 상징적 의미가 더 크다”는 것이다.

기자들에 ‘돈 경품’ 물의
지난 3일 오후 7시 서울 중구 장충동 ‘서울클럽’에서 김 총장 주재의 만찬이 열렸다. 김 총장을 비롯해 8명의 대검 간부와 신문 방송의 법조 출입 1진 기자 24명이 동석했다. 당시 메뉴는 양식 코스요리였다고 한다. 메인 요리가 나온 뒤 주문이 잘못돼 음식이 늦게 나오면서 분위기가 가라앉자 김 총장이 즉석 제안을 했다. 경품을 걸고 추첨해 당첨자에게 주겠다는 것이었다. 마침 김 총장이 서울의 한 검찰청에 순시를 갔다가 오는 길이어서 쓰고 남은 격려금 봉투를 가져오라고 비서진에 지시했다.

검찰총장이 쓸 수 있는 이른바 ‘특수활동비’다. 추첨할 때 필요한 종이가 모자라 냅킨을 사용하기도 했단다. 참석자들이 두 개씩 번호를 적은 뒤 종이나 냅킨을 찢어 하나는 추첨함에 넣고 다른 하나는 소지하고 있다가 당첨자를 뽑는 식이었다. 처음엔 격려금 봉투가 4개밖에 없어서 그걸로 끝내려 했다고 한다.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봉투 4개가 급히 추가로 만들어졌다. “간부들이 말릴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즉흥적인 것이었다”고 당시 현장에 있던 검찰 간부는 전했다.

그는 “경품촌지란 표현은 맞지 않다. 촌지를 공개적으로 추첨해서 주는 게 어디 있느냐. 추첨 게임이라고 보면 맞다”고 덧붙였다. 김 총장이 먼저 뽑고 대검 간부들이 돌아가며 추첨을 했다. 결국 50만원씩이 든 8개의 봉투가 기자들에게 건네졌다. 대검의 한 관계자는 “김 총장은 처음 경품 추첨을 시작할 때부터 일단 돈을 사용한 뒤 자비로 갚을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이 일이 언론에 보도된 6일 대검에는 비상이 걸렸다. 간부 회의가 연달아 열렸다. 한 대검 직원은 “김 총장 취임 후 가장 상황이 심각한 하루였다”고 말했다. 재경지청의 한 검사는 “검찰총장이 만찬석상에서 현금 경품을 내놓았다는 얘기는 과거에도 들어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김 총장은 공식 사과했다. 그는 “사려 깊지 못한 행동으로 본의와 달리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정치인 접촉 금지령 내려
김 총장은 사시 1기 후배인 천성관 전 검찰총장 내정자가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낙마하면서 대안으로 낙점됐다.

청와대의 낙점을 받은 직후 기자회견에서 “그동안 음해가 너무 심해 마음이 아팠다”며 눈물을 보였다. 이는 자질론 시비로 이어졌다. 그의 독특하고 자유분방한 스타일이 검찰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을지, 상처를 줄지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반반씩이라는 전망이 적지 않았다. 김 총장은 이런 걱정을 사라지게 하려는 듯 취임 후 검찰 조직에 새 바람을 불어넣으려고 애를 썼다. 직원 복지를 위해 대검 안에 배드민턴장을 여러 개 만들었다. 대검 별관 예식장의 빈 공간에도 배드민턴을 칠 수 있도록 해 놨다. 대법원과 대검 사이의 철제 장벽도 없애고 키 작은 나무들로 대체했다. 검찰총장이 하던 결재를 대폭 대검 차장에게 이양했다. 또 특별한 현안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검찰총장 자신을 포함해 검사들이 정시에 출퇴근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 중이라고 한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 강화와 관련, 업무와 관련이 있더라도 검사장급 이하 검사들은 정치인들을 만나지 말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정치인 접촉 금지령’이다.

일부 검사들은 대검 중수부가 김 총장 취임 이후 예전 같지 않다며 아쉬워하기도 한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이후 중수부의 힘이 빠진 상태에서 김 총장이 ‘예비군론’을 내세워 대형 수사를 하지 않도록 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김 총장은 최근엔 대검에 국제협력센터를 출범시켰다. 국제 분야의 협력 강화를 위해서라고 한다. 국제통으로 불리는 김 총장의 관심 분야다.

김 총장은 취임사에서 수사 패러다임의 변화를 주문했다. “하드웨어를 아무리 바꿔봤자, 소프트웨어가 변하지 않으면 과거와 달라질 게 없다”고 했다. 한 법조계 인사는 “소프트웨어를 바꾸되 겉으로 드러나는 것 말고 수사 여건을 실질적으로 강화하는 방향으로 변화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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