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麗羅 동맹"이 성사됐더라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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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호 09면

2006년 방영된 SBS 드라마 ‘연개소문’의 연개소문 (사진 위유동근). 방영 중인 MBC드라마 ‘선덕여왕’의 김춘추 (유승호)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이라는 말이 있다. “얼음과 불붙은 숯은 서로를 용납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차라리 그냥 물이면 불을 일방적으로 압도한다. 하지만 얼음은 불붙은 숯의 열기에 녹아내리고 만다. 그리고 녹으면서 불을 꺼트린다. 친해지고 싶어도 본질적으로 사고방식과 이해관계가 정반대이므로 친해질 수가 없고, 서로를 해치고서야 끝나는 만남. 그것이 얼음과 불의 만남이다.

함규진의 한국사를 움직인 만남 <2>김춘추와 연개소문

지금으로부터 1367년 전인 642년,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에서 그런 만남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만남은 한국사의 물줄기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그러니까, 귀공의 존함이 춘추…. 김춘추라 하였는가?”
“네. 그렇습니다. 저희 선왕 되시는 진평대제님의 외손자이며, 지금 재위해 계시는 임금님의 조카가 되지요.”
“…흠. 그래, 무슨 일로 이 먼곳까지 찾아온 것이오?”
“귀국과 우리나라 모두에 이익이 되는 제안을 드리려 왔습니다.”
“고구려와 신라 모두의 이익이 되는 제안이라?”
“그렇습니다. 연개소문 대막리지 합하! …바로 저희 신라와 고구려가 동맹을 맺는 것이옵니다.”

“호오, 동맹이라. 딴은 우리와 손을 잡으면 귀공의 나라에는 큰 이익이겠소. 백제 등쌀에 발 뻗고 잘 날도 없으니 말이오. 듣자 하니, 얼마 전에는 귀국의 대야성을 저들이 빼앗았고, 그 과정에 귀공의 따님이 목숨을 잃었다던데?”
“…하늘의 뜻이었겠죠. 그러나 제가 동맹을 제안 드리는 것은 사사로운 복수심 때문이 아닙니다. 고구려도 신라와 동맹하면 이익이 됩니다. 지금 고구려는 앞뒤로 적을 둔 상태가 아닙니까? 게다가 그 한쪽은 천하에 막강한 당나라지요. 그들과 맞서고 있는데 뒤에서 적이 또 쳐들어오면 아무리 고구려라도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저희와 손을 잡으시고….”

“…함께 백제를 친다. 그래서 백제 땅을 나누어 먹는다, 이 말씀이겠지? 괜찮겠군. 좋아요. 동맹을 합시다.”
“아, 정말 다행입니다! 그러면 국왕 폐하를 만나 뵙고 정식으로….”
“다만, 조건이 있소. 귀국이 동맹을 맺는 신의의 표시로, 원래 우리 땅이었던 마현과 죽령을 되돌려 주시오. 그러면 동맹을 맺으리다.”
“…제게는 그런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습니다. 그리고 신의 표시로는 너무 과하다고 여겨집니다.”

“흥! 과하기는 개뿔이 과한가? 과거 왜구가 쳐들어와서 나라가 망하게 된 것을 우리 광개토대왕께서 구해주시지 않았더냐! 그런데 너희가 무슨 보상을 했더냐? 보상은커녕 나중에 백제와 손을 잡고 우리 고구려를 치더니만, 이번에는 백제를 배신해서 백제 왕을 죽인 게 너희 신라놈들 아니냐? 너희처럼 신의라고는 약에 쓰려도 없는 인종과 무슨 동맹을 할까? 여봐라! 어서 이 신라놈을 감옥에 가둬라!”

이렇게 해서 연개소문과 김춘추 사이의 ‘평양회담’은 실패로 끝났다. 이는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짓는 회담으로서 현대의 김구-김일성 회담이나 김대중-김정일 회담에 비할 만했다. 그런데 김춘추와 연개소문은 기본적으로 합의점을 찾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성격부터 판이했다. 김춘추가 문(文)을 대표한다면 연개소문은 무(武)를 대표했는데, 김춘추-김유신의 경우에는 문과 무의 완벽한 조화가 가능했으나 이 경우에는 완벽한 배척이었다.

귀족적 교양과 달변의 소유자인 김춘추는 외교의 달인이었다. “내가 힘이 약하면 남의 힘을 빌려 강해지면 된다”는 게 그의 신조였다. 반면 대막리지가 되어서도 늘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다니며 언제라도 칼을 휘두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연개소문은 타협을 싫어했고, 오직 자신의 힘으로 난관을 돌파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영류왕과 의견 대립이 생기자 그를 시해하고는 정권을 장악했고, 노년(죽기 4년 전)에도 직접 싸움터에 뛰어들어 싸웠다. 반면 그를 불세출의 영웅으로 그린 야담을 포함해서, 그 어디에도 그를 보좌한 제갈량이나 을파소 같은 문신의 존재를 찾을 수가 없다.

물론 평양회담의 결렬 원인이 두 사람의 성격 차이에만 있지는 않았다. 연개소문의 말처럼 고구려는 신라를 신뢰하기 힘든 처지였고, 신라는 당시부터 당나라와 밀착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신라와 손잡고 백제를 공격하다 자칫 당나라에 뒤통수를 맞을 수 있음을 우려했을지 모른다. 연개소문은 김춘추가 평양에 온 의도가 정말 동맹을 맺기 위해서가 아니라 염탐이 아닌지 의심했다고 하는데,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여라(麗羅) 동맹’은 해볼 만한 일이었다. 전통적으로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 중 어느 한쪽이 강해지면 약한 쪽과 동맹을 맺어 강자를 억제하는 세력균형 전략을 써왔다. 당시는 백제가 대야성을 빼앗으며 신라를 위협하던 때이므로, 잠정적으로나마 신라와 동맹하여 백제를 억제할 필요가 있었다. 한반도 남부를 안정시키고 당나라와의 대결에 전념했다면 대당전에서 보다 여유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동맹의 대가로 제시한 ‘마현과 죽령의 반환’은 김춘추가 아니라 선덕여왕이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이곳은 지금의 강원도와 경상북도에 속하는 곳으로, ‘고구려의 옛땅’이라지만 가장 세력이 팽창했을 때를 빼면 내내 신라의 땅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전략적 요충지로서 이곳을 얻으면 신라의 수도로 곧장 진격할 수 있는 관문을 확보한다. 이런 땅을 달라고 요구했음은 동맹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투옥된 김춘추는 ‘화왕계’를 듣고는 거짓으로 땅을 바친다고 해서 풀려났다고 하는데, 연개소문이 그 말을 곧이들어서라기보다 평양행 이전의 약속대로 김유신이 병력을 이끌고 북상 중이었기 때문에 ‘굳이 여기서 전쟁을 할 필요는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라 동맹에 실패한 김춘추는 6년 뒤 당나라를 방문해 나당(羅唐) 동맹을 맺는다. 이것이 결국 강국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세력구도가 된다. 신라도 나당 동맹이 좋지만은 않았다. 늑대를 물리치려 호랑이를 끌어들인 셈이었고, 결국 나당전쟁을 치렀을 뿐 아니라 당나라를 상국으로 받들고 그 문화를 받아들여 이 땅을 중국화하는 속국의 길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여라 동맹이 이뤄졌다면 한국사는 고구려와 신라의 ‘남북조 시대’를 열고, 중국의 군사적·문화적 침략이 오랫동안 저지되었을지 모른다.

인간의 성격은 쉽게 바꿀 수 없다. 하지만 냉철한 이성과 겸허한 마음은 도저히 맞지 않는 상대와의 대립을 누그러뜨린다. 그리고 대립의 벽 너머 멀리, 진정한 이익을 볼 수 있게 한다.


성균관대 정치학 박사로 현재 성균관대 부설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 『정약용 정치사상의 재조명』『왕의 투쟁』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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