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 '거듭 태어난' 후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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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미국 대통령후보로 나선 사람들 사이에 요즘 이상한 바람이 불고 있다.

경쟁적으로 자신들의 신앙심이 돈독함을 자랑하고 다닌다.

젊었을 때 마약을 했느니, 알콜중독이 됐느니 소문이 무성한 조지 W 부시 후보는 "젊은 시절 나의 행동은 성숙지 못했을 때의 일이니 40세 이전의 나를 보지 말고 그 이후의 나를 보아달라" 고 말하고 있다.

그는 40세 때 기독교에서 말하는 소위 '거듭 태어난 크리스천(Born-Again Christian)' 이 되어 이제는 과거의 자기가 아니라 새사람이 되었음을 고백했다.

그는 최근 공화당 후보간의 TV토론에서 가장 좋아하는 정치철학자를 "예수 그리스도" 라고 대답했다.

그는 "말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당신들이 예수를 영접하면 그때부터 당신들의 인생이 바뀐다.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당신들에게도 일어난다" 고 전도사 같은 얘기를 털어놓았다.

민주당의 앨 고어 부통령 역시 CBS방송의 '60분' 이라는 대담프로에서 스스로를 '거듭 태어난 크리스천' 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매사를 '예수라면 어떻게 했을까'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본 뒤 결정을 한다고 말했다.

공화당 매케인 후보의 TV광고는 "그가 월남전 때 포로가 된 뒤 월맹의 포로수용소에서 크리스마스에 동료 포로들에게 한 설교는 감동적이었다" 고 그의 신앙심을 선전하고 있다.

공화당의 게리 바우어 후보는 TV토론에서 성경구절을 외워가며 자신의 정치관은 신앙심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미국 헌법은 종교와 국가를 분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서 공개적인 기도를 금지하고 있고 종교재단의 학교에 정부지원금을 주어야 하느냐, 창조론과 진화론을 어떻게 가르치느냐는 등의 문제가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자유주의적 성향의 엘리트층은 이러한 헌법 정신의 실현을 위해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계속 추구하고 있다.

또 미국민의 40%만 스스로를 기독교 신자로 인정하고 있는 만큼 나머지 60%에게는 후보들의 이러한 접근이 반드시 선거에 도움이 된다고 얘기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대통령후보들은 경쟁적으로 신앙심을 강조하는 것일까.

미국은 지금 최대의 번영을 누리고 있다.

만성 재정적자 나라에서 7천억달러의 흑자를 내어 그 돈을 어디에 쓸까 고민 중이다.

실업률은 30년 내에 최저가 되어 백화점.식료 잡화점.맥도널드에서는 길가에까지 구인광고를 내다붙이고 있다.

집을 지었다 하면 대형주택이다.

20년 전과 비교할 때 새 집의 사이즈가 25% 커졌다는 통계가 나오고 있다.

3만7천달러짜리 포드 지프가 공장에서 나오자마자 팔린다.

전가구의 절반이 주식투자를 하고 있다.

이러한 물질적 풍요 속에서 왜 대통령후보들은 뚱딴지 같은 신앙심 경쟁일까.

92년 대선 때 클린턴 후보는 "문제는 바로 경제야, 이 바보야(It' s Just the Economy, Stupid)" 라는 한마디 구호로 현직 부시 대통령을 꺾었다.

걸프전에서 승리한 부시는 한때 지지도 90%라는 인기를 누렸지만 저조한 경제 때문에 고배를 마셨다.

클린턴 집권 이후 미국 경제는 정말 달라졌다.

누구도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클린턴 대통령이나 고어 부통령은 기회만 있으면 민주당 정부가 이룬 경제 번영을 자랑한다.

그러나 요즘 그들을 향해 정 반대의 말이 나오고 있다.

"경제가 전부가 아니야, 이 바보야(It 's No Longer Just the Economy, Stupid)." 미국민은 요즘 풍요 속에서 목말라하고 있다.

경제적 풍요가 해결 못하는 무엇이 있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

그 목마름은 바로 정신적인 것에 대한 추구며 도덕성의 회복, 도덕적 리더십의 출현이다.

실내체육관만한 차고가 딸린 집에 트럭만한 승용차를 타고 다니지만 그것이 자기들이 바라던 좋은 인생은 아니지 않으냐는 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클린턴 대통령의 성추문을 부끄러워하고 있다.

학교마다 공항검색대처럼 금속탐지기가 설치돼 있다.

그럼에도 덴버 컬럼바인고교에서는 아무 이유 없는 총기난사로 십수명이 죽었다.

자녀들은 부모.선생님으로부터가 아니라 TV.인터넷, 그리고 닌텐도 게임에서 인생을 배우고 있다.

무언가 잘못돼 가고 있다는 공감대가 확산돼 가고 있다.

이런 분위기가 대통령후보들간의 신앙심 경쟁을 야기하고 있다.

오늘은 그리스도 탄생 2천번째 날이다.

이제 새 천년에 들어간다.

우리 사회는, 아니 우리 각자는 지금 무엇에 목말라하고 있는가.

그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할 것이며, 어떤 모양의 사람이 우리 지도자가 돼야 할 것인가.

이 성탄의 아침 조용히 생각해 보자.

문창극 미주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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