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18)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18) 의문에 싸인 인물

76년 2월 초순 어느날,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전산부장인 성기수(成琦秀.65.전 동명정보대 총장)박사가 급히 내 방에 들어왔다.

가끔씩 국방과학연구소(ADD)를 방문하던 터라 별다른 생각없이 그를 반겼다.

그런데 이날 따라 成박사는 왠지 상기돼 있었다.

평소 침착하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양복 안 주머니에서 한 통의 편지를 꺼내며 내게 말했다.

"먼저 이 편지부터 읽어 보게. 그리고 나서 나하고 얘기하지. "

겉 봉투를 봤더니 보낸 사람이 '오네스트 신' 으로 돼 있었다.

미국에서 온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나로서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빠른 속도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내용인즉 '레이저 핵융합 기술을 알고 있으니 레이저와 관련된 전 분야를 자기에게 맡겨 달라' 는 것이었다.

요컨대 레이저 핵융합을 통해 인공(人工)태양의 기초를 완성, 원하는 만큼의 에너지를 인공태양에서 얼마든지 끌어 내겠다는 얘기였다.

1년에 4억원씩, 4년간 연구비를 달라는 조건도 제시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가당치도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成박사에게 "이거 말도 안 돼.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야!" 하며 목청을 높였다.

그러자 成박사는 정색을 하며 내게 말했다.

"그 친구는 나의 하버드대 동창일세. 수재야 수재. 아무렴 하버드대 박사가 아무 근거도 없이 허풍만 치겠나. 한번 검토를 해 보게. "

成박사는 내가 ADD 레이저실장이므로 먼저 나한테 얘기하는 게 순서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成박사와는 아주 가깝게 지냈다.

그는 61년 하버드대 대학원에 입학, 2년만에 응용물리로 석.박사 학위를 받은 천재였다.

하버드대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었다.

KIST 초창기 멤버로 그당시 한국 과학계의 보배였다.

그런지라 나는 그의 말이라면 신뢰했다.

그러나 이번만은 경우가 달랐다.

내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어느 한 개인이 레이저 핵융합 기술을 개발한다는 것은 '바위에 달걀을 던지는 격' 이었다.

미국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51년 원자탄을 기폭제(起爆劑)로 사용, 수소폭탄을 개발함으로써 핵융합에 성공했다.

그러나 레이저 핵융합 기술은 이보다 훨씬 더 어렵다.

약 1백여개 방향에서 20억분의 1초 안에 레이저 광선을 동시에 발사, 핵용합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그만큼 최첨단 기술을 필요로 한다.

만약 레이저 핵융합에 성공할 경우 핵무기 모의실험이 가능할 뿐 아니라 엄청난 에너지를 평화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당시 1만명의 과학자를 보유한 미국의 최대 원자력연구소인 '로렌스 리버모아' 가 레이저 핵융합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연간 수억 달러 이상을 투자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현재까지 이 연구는 계속 진행중이다.

나는 그무렵 미국의 엑센 연구소 등에서 레이저 핵융합에 대해 집중 연구하고 있던 김효근(金孝根.63.광주과학기술원 원장)박사를 통해 이같은 사정을 상세히 알고 있었다.

또 미국내 '한국과학기술인협회' 소속 과학자들과 최근 연구동향에 관해 수시로 의견교환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니 '오네스트 신' 의 주장이 내게 황당무계하게 들린 것은 당연했다.

나는 정색을 하고 成박사에게 말했다.

"아무리 하버드대 출신의 천재 물리학자라고 해도 레이저 핵융합 기술을 혼자서 개발한다는 건 도대체 말이 안 되네. 미국의 '내노라' 하는 연구소도 못 해 내지 않았나. 자네는 이 일에 관여하지 말게. "

그런 다음 나는 成박사에게 "이 편지를 일단 위에 보고하겠다" 고 말했다.

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였다.

다음날 아침 ADD 선임 부소장인 현경호(작고)박사에게 그 편지를 전달했다.

며칠후 심문택(沈汶澤.90년 작고)소장 방에 갔더니 그도 편지건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玄부소장으로부터 사전 보고를 받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갔다.

글= 한필순 원자력연구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