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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마르지 않는 상상의 샘 책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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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위상이 떨어질 때 문화의 생산성은 메말라 간다. 인문학의 위기도 결국 책을 통한 상상과 성찰의 부족 때문이 아닐까. 어떤 목적을 위한 독서를 멈추고 이 가을엔 그저 독서에 빠져보자.

교과서를 읽는 학생은 부모를 안심시키지만 ‘쓸데없는 책’을 읽는 아이는 부모를 걱정스럽게 한다. 어린 시절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바른 생활’ 어린이는 아니었다. 그저 책과 함께 ‘노는’ 아이였다. 어쩌면 나는 얇은 종이들이 모여 딱딱하게 묶여진 책의 물질적 감촉에 매혹되었는지도 모른다. 가장 사랑하던 책은 금성출판사의 세계명작동화 전집이었다. 빨간 색과 파란 색의 하드 커버들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그 한 권, 한 권을 펼칠 때마다 무궁무진한 상상의 세계들과 만날 수 있었다. 소년중앙과 어깨동무, 새소년 같은 어린이 잡지들 역시 잊지 못할 이름이다. 긴 겨울 밤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린 채 나는 무수한 이야기를 읽고 또 읽었다. 그 읽을거리가 아니었다면 도대체 어떻게, 둑의 구멍을 손으로 막아 나라를 구한 네덜란드 소년의 일화와, 영국 네스 호수에 산다는 괴물 네시의 존재, 수억 년 전 멸종된 공룡들의 삶에 대해 알 수 있었을까? 고백하건대, 책은 익숙하고 무료한 현실로부터 새롭고 낯선 세계로 나를 인도해준 마법의 양탄자 같은 것이었다.

▶ 뉴미디어가 득세하는 시대이지만 책은 여전히 문화적 상상력의 원천이다. 한 대형서점에서 책읽기에 몰두하고 있는 어린이들. 사진=임현동 기자

‘유희(遊戱)로서의 독서’. 이 말은 자못 불경스럽게 들린다. 놀기 위해 책을 읽는다니. 혹자는 무슨 돼먹지 못한 태도냐고 화를 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책과 인간 사이의 진정한 교감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흔히 ‘책 읽는다’는 것을 ‘공부’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여왔다. 어린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문자를 습득하고 지식을 배운다는 것은 곧 그가 속한 사회적 규칙과 권위에 적응해나가는 과정이라고 간주돼 왔기 때문이리라. 그 동안 한국의 교육제도 속에서 ‘책’이라는 한 음절의 단어는 곧 제도적 규범의 영역을 의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암기해야만 하는 정보로 빼곡한 ‘교과서’의 세계는 더욱 그렇다. 제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독서의 고통! 학습의 대상으로 책을 접한 사람들이 책 읽기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혹시 책에 대한 이런 식의 깊은 편견이 책을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대상으로 만든 것은 아닐까? 이제는 책에 대한 수동적인 사고를 거둘 때가 됐다. 자발적인 독서는 읽는 이에게 괴로움이 아닌 쾌락의 순간을 선사한다. 또한 역설적이게도 독서 행위는 문자가 축적한 지식의 세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자유로운 책 읽기는 기존의 권위 속에 갇힌 개인의 의식을 해방시킨다. 책으로 책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널리 알려진 독서 캠페인 표어 중에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이 있다. 책이 인간에게 여러 가지 지혜와 통찰을 전해준다는 측면에서 이 말은 옳다. 그렇지만 책이 단 하나의 길만을 가르쳐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책들이 있고 이 책들은 각각 고유한 우주를 품고 있다. 하나의 새로운 책은 그 이전의 다른 책들을 부정함으로써 탄생하고, 그것은 우리의 지식과 지혜를 새롭게 한다. 그러므로 하늘의 별만큼 많은 책들은 또 그만큼 다양한 길들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셈이다.

또한 한 권의 책 속에 반드시 하나의 길만이 제시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한 권의 책은 폐쇄된 성곽이 아니라 그 안에 수많은 틈새와 굴곡을 숨기고 있는 활짝 열린 공간이다. 그 책의 세계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가서 그 틈새를 파고들고, 채우고, 그 굴곡을 체험하는 것은 전적으로 읽는 이의 몫이다. 이렇게 책에 몸을 담그는 ‘나만의 독서행위’를 통해 그 책은 온전히 ‘나의 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한번 읽었던 책을 또다시 꺼내어 읽었을 때, 전에 느끼지 못했던 감동을 새로 발견하는 것만큼 신비로운 경험도 드물다. 이 경우 책 속에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삶의 여정 위에 책이 놓여있다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와 같이 개개인의 창조적인 독서가 모여 한 사회 전체의 문화를 풍요롭게 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그런데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실은 어떤가. 언제부터인가 ‘책은 죽었다’ 는 풍문이 심심찮게 들려오고 있다. 출판 시장의 불황이 심각한 정도를 넘어 ‘대란’ 의 수준이라는 얘기도 더 이상 충격적인 뉴스가 아니다. 여기에는 경제적 불황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영화와 인터넷 등 뉴미디어의 득세가 중요한 원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디지털 영상문화의 확산이 문자문화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일까? 시장의 논리로만 따진다면 이러한 진단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책이라는 매체의 일시적인 위축이 곧 ‘문자적 사유’전체의 죽음을 뜻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아주 기본적인 측면에서 문자언어와 문자적 사유에 기반하지 않은 ‘영상’ 만의 소통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문자언어는 문화적 상상력의 기원이다.

예를 들어 영화 ‘반지의 제왕’의 첨단 테크놀로지에 의한 놀라운 스펙터클은 원작자 J R 톨킨의 ‘서사적 상상력’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어떤 영화도 이야기를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는 이상 상상적 모험의 원천이 되는 것은 바로 ‘문자의 힘’이다. 또한 영상문화에 담겨 있는 세계관이나 영상문화를 향한 성찰의 언어도 기본적으로 문자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문자언어의 상상력과 성찰의 기반 없이는 창조적이고 비옥한 영상문화의 도래를 기대하기 어렵다. 오늘날 인문학이 위기에 처했다는 명제가 사실이라면, 그것은 책을 통해 상상하고 성찰하는 능력의 위기에 다름 아닐 것이며, 나아가 그것은 모든 문화적 창조력의 고갈이라는 재앙을 의미한다. 문화의 영역에서 책의 위상이 떨어질 때, 그 문화의 생산성은 메말라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러한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의미 있는 움직임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서울문화재단이 시내 31개 공공도서관과 함께 시작하는 ‘책 읽는 서울’운동은 독서가 모든 기초예술의 근간이라는 자명한 인식 아래 펼쳐지는 것이어서 더욱 반갑다.

책은 우리에게 언제나 또 다른 삶의 체험을 제공한다. 타인의 가치관에 귀기울이게 해주고, 지금 내가 아는 지식이나 내가 믿고 있는 신념의 ‘바깥’이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독서는 인간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창의적인 존재로 만든다. 꿈꾸는 유목민이 되게 한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나는 책을 통해 현실의 저 너머를 살았다. 자그마한 책상 앞에 앉아 『소공녀』의 다락방과 『어린 왕자』의 소혹성 B-612, 『로빈슨 크루소』의 무인도를 차례로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책이 준 크나큰 선물이었다. 비록 현실에서는 지구 위의 모든 땅을 여행할 수 없지만, 책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극한’을 경험할 수 있고 ‘극지’ 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은 인간 존재의 내면에 환하고 단단한 한 톨의 씨앗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이 세상의 책을 다 읽고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우리는 각자 생의 부피만큼의 책을 읽고 갈 수 있을 따름이다. 도서관 서고 가득히 꽂혀 있는 책들을 바라볼 때면 궁금해지곤 한다. 현존하는 저 많은 책들 가운데 먼 훗날 스스로에게 추천할 수 있는 ‘인생 최고의 책’은 무엇일까. 꼭 읽어야 할 그 한 권의 책은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혹은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기하지는 않겠다. 하나하나 야금야금 읽어 가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조우하게 될 테니까! 그 미지의 책과 미지의 신세계를, 오늘도 나는 설레며 기다리고 있다.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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