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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이탈리아 디자인 입고 박물관 밖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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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알레산드로 멘디니가 디자인한 청자 오브제 드로잉을 바탕으로 유광열씨가 빚은 대형 청자 항아리 연작. 왼쪽부터 청자 매병의 둥근 어깨를 몸통 전체로 확대 해석, 높이 78㎝. 꽃봉오리 형상을 물결무늬로 부드럽게 변주, 65㎝. 청자 참외형병을 세련되게 마감, 70㎝. 현대적인 문양으로 세련미 효과, 83.5㎝.[해강고려청자연구소 제공]


유광열(67) 해강고려청자연구소 소장은 1일 오후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거울못 앞에 선 ‘청자정(靑瓷亭)’을 찬찬히 바라봤다. 고려기와의 비색이 하늘로 날아오를 듯 고왔다. ‘신의 손길이 닿은 색’이라는 저 푸른빛을 되살리려고 열 달 동안 입술이 부르트도록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다.

“각종 문헌과 기록, 발굴된 고려청자기와 파편 등을 들이 팠습니다. 1157년(의종 11년)에 황해도 개성 언저리에 세웠던 정자 ‘양의정’의 지붕을 청자기와로 덮었다는데 그 기와 사금파리가 1927년 고려시대 왕궁지였던 만월대에서 수습됐지요. 850여 년 전 선조 때 도공이 빚었을 청자기와를 상상하며 손끝에 힘을 모았습니다.”

멘디니가 1978년 내놓아 화제를 모은 화려한 점묘 채색의 고풍스러운 안락의자 ‘프루스트’의 원형(왼쪽), 이를 청자로 재현한 유광열씨의 ‘청자 프루스트’.

◆동·서 장인의 만남=해강 유광열씨는 올해 또 하나 큰일을 냈다. 이탈리아가 낳은 디자인계의 거장 알레산드로 멘디니(78)와 손잡고 청자 화병과 도자기를 빚기 시작했다. 현대 고려청자가 세계로 도약할 든든한 발판을 지은 셈이다.

“하도 유명한 인물이라고 해서 좀 얼었지요. 만나보니 거장다우면서도 수수했어요. 명장이 명장을 알아본다고나 할까요. 아시아 문화에 관심이 많다고 말문을 연 멘디니가 이러더군요. ‘한국 청자는 환상적이고, 특히 빛깔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요. 그 한마디로 뜻이 통해버렸죠.”

멘디니가 디자인한 다섯 가지 대형 화병을 청자로 빚고 구워내는 데 또 몇 달이 흘러갔다. 마음에 안 드는 걸 깨고 또 깨면서 날밤을 새며 연구했다. ‘청자 작업을 할 수 있는 건 행운’이라며 좋아하던 멘디니를 단번에 만족시킬 수 있는 명품이 나와야했다.

“세계로 나가려면 유럽인의 시각과 취향을 사로잡아야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었어요. 청자는 자연에 본능이랄 만큼 가까이 다가간 원시적인 색감과 풍부한 질감을 지녔죠. 메마른 현대사회에 청자가 줄 수 있는 감성은 일종의 정서 회복제라 할 수 있습니다. 멘디니는 그걸 꿰뚫고 있었어요. 그러니 그에게 합격점을 받으면 세계로 갈 수 있는 거죠.”

10~29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 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리는 ‘청자 리디자인 & 리바이벌 프로젝트(Celadon Redesign & Revival Project), 알레산드로 멘디니의 청자전’은 해강과 멘디니가 협업한 첫 결실의 자리다. 멘디니는 전시도록에 쓸 인사말을 보내왔다.

‘청자로 만들어진 저의 화병과 ‘프루스트’ 의자를 보게 돼 기쁩니다. 저는 점점 청자라는 매체가 지닌 매력과 시정(詩情) 그리고 해강이 어떻게 청자를 동시대적 형태로 만족스럽게 만들어 가는지 깨닫고 있어요. 이번에 나온 청자들은 고대의 숭고한 전통과 현대적 디자인의 결합에 관해 저에게 통찰을 하게 만듭니다’.

◆3대를 대물림하는 청자 가문=해강은 “이제 좀 눈이 뜨이는 것 같다”고 했다. 중국이 잘 따라오지 못하고 일본도 부러워만 한 ‘청자 대국’ 한국을 부활시키려는 해강 집안의 피 내림이 3대로 이어지는 중이다.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한 해강의 아들 유재형(38)씨는 “아들 태현에게도 우리 가문이 걸머진 동시대 청자 생산의 책임을 지워주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미국에 유학한 재형씨는 청자의 세계 도자 시장 진출의 실무를 맡는다.

해강의 선친인 1대 해강 고(故) 유근형씨는 ‘그 미려한 선, 우아한 색채, 은은한 광택에 매료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여다보고 있다. 모두가 신비로운 미의 극치다’라는 글을 남겼다. 그 지극한 청자미를 세계인 모두 즐길 수 있게 하려고 경기도 이천의 해강고려청자연구소 장인들은 오늘도 가마 앞에서 땀을 흘린다.

정재숙 기자

◆유광열=우리나라 청자 재현에 평생을 바친 도자기의 명장 해강(海剛) 유근형(1894~1993)의 장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960년에 해강고려청자연구소를 설립한 뒤 93년 선친의 작고로 2대 해강을 습명(선대의 이름을 계승) 받았다. 2006년 대한민국 도자기공예 명장으로 선정됐다.

◆알레산드로 멘디니=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나 1959년 밀라노 공과대 건축학과를 나왔다. 현지 디자인 잡지 ‘모도’ ‘도무스’의 편집장을 지내며 진보적 디자인 이론에 기반한 혁신운동을 펼쳤다. 89년 동생 프란체스코와 밀라노에 공동 설립한 ‘아틀리에 멘디니’를 근거지로 세계 여러 기업과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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