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시론]클린턴 '친서' 재앙될 것인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지구 온난화 방지를 위해 채택된 교토(京都)의정서 내용과 달리 한국의 온실가스 감축연도를 10년 앞당겨 달라는 내용의 친서를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이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에게 전달했다는 것은 기후변화협약에 대한 선진국의 압력이 이제 현실로 다가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는 미국의 요구에 대해 일단 자발적이면서 비(非)구속적으로 온실가스 감축에 참여하겠다는 내부입장을 정리해 놓고 있지만 미국이 쉽게 압력수위를 낮추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렵다.

우선 클린턴 대통령으로서도 기후변화협약에 대한 개도국의 실질적인 참여를 보장하지 않고는 자국 의회의 비준을 얻어내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상징적으로 우리나라와 같은 선발개도국의 의무부담을 요구하는 것이 클린턴 대통령에게는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전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24%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에는 자국의 온실가스 감축비용을 감소시키는 것이 최대 현안일 수밖에 없다.

선진국들이 자발적인 감축의무와 함께 교토 메커니즘을 도입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교토메커니즘이란 배출권 거래제와 같은 시장원리에 입각한 온실가스 감축수단을 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미국의 경우 5백30억달러에 이르는 저감비용이 선진국간 배출권 거래를 허용할 경우 2백70억달러로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우리나라처럼 온실가스를 많이 줄여야 하는 국가가 감축의무에 참여해야 명분이 설 뿐 아니라 개도국을 많이 끌어들일수록 미국은 교토 메커니즘을 통해 자국의 감축비용을 줄일 수 있는 여지가 늘어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은 압력을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환경에 대한 전지구적 관심으로 출발한 기후협약은 결국 21세기 신(新)경제전쟁의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최근 고유가가 지속되면서 우리의 에너지 다소비 구조에 대한 경고가 끊이지 않았다.

비단 고유가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향후 기후협약이 구체화될 경우 우리 경제에 큰 타격이 되리라는 것은 누차 강조된 바 있다.

2010년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5% 감축할 경우 국내총생산(GDP)이 0.47% 줄어들며, 극단적으로 1990년 수준으로 동결할 경우 GDP는 감내할 수 없는 충격을 받는다는 전망도 있다.

설사 다자간 협상의 어려움으로 인해 국제협약은 유명무실해진다고 하더라도 미국 등 선진국들은 교역의 무기로 환경을 활용할 가능성이 크며 이 경우 현재의 에너지 다소비 시스템으로는 경쟁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이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먼 이웃나라의 이야기로만 들릴 뿐이다.

실제로 정부나 기업, 국민 어느 누구에게서도 기후변화협약이 가져올 재앙을 걱정하지만 알맹이 있는 진지한 우려나 고민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국무조정실에 설치돼 있는 대책반 하나로서는 노도와 같은 선진국의 압력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기후변화협약을 헤쳐나가기 위한 국가적 전략도 충분히 마련돼 있지 않은 상태다.

강한 외교적 협상력을 갖고 있는 중국이나 인도와는 달리 우리는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것 외에는 달리 선택할 길이 없다.

이를 위해서는 에너지산업의 시장기능을 조속히 회복하도록 해야 한다.

정부가 규제하던 수급을 이제는 가격이 조절하도록 해야 한다.

이는 소비합리화에도 필요하고 산업구조변화를 가속시키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물론 정부는 이 과정에서 국민에게 미치는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다각적인 정책적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에너지가격을 현실화할 경우에도 단계적으로 접근함으로써 경제가 대처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마련해 주는 것도 필요하다.

또 현재의 가격체계 아래에서는 가정과 기업이 에너지 절약에 투자할 요인이 적으므로,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절약사업을 도와줄 필요가 있다.

또한 정부는 현재의 대책반을 범정부적 조직으로 확대.격상해 국가적 과제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뤄야 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기후변화협약을 전문적으로 다룰 비서관을 청와대에 두는 것도 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밑바탕에 사회적 합의가 깔리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 우리는 남에게는 절약을 요구하면서도 스스로는 불편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

정부와 기업이 시민단체와 손을 잡아야 하는 이유도 사회적 합의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장현준 에너지경제연구원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