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를 넘어] 18.끝 性혁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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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중앙일보가 밀레니엄기획으로 경남대(총장 박재규)와 함께 마련한 '세기를 넘어' 시리즈가 18번째 주제 '성(性)혁명' 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성은 지난 1백년간 인류의 실생활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왔고, 그 변화의 양상은 수만년 인류역사의 흐름을 뒤집는 것이기에 혁명이란 이름을 붙였다.

인류는 20세기 들어 '성〓생식' 이라는 자연의 기본법칙을 뛰어넘었다. 자유로운 성은 동물적 생식의 차원을 벗어나 쾌락의 수단으로 바뀌어 극대화의 길을 치달아왔다. 더불어 금기시.죄악시되던 비정상적 행위들도 과학적 분석과 논의를 거치면서 당당한 권리로 인정받게 됐다.

20세기의 마지막을 비아그라로 장식한 성의학은 새로운 세기에 또다른 성혁명을 예고하고 있다. '세기를 넘어' 시리즈는 20세기를 상징하는 주제와 인물을 통해 지난 세기를 정리하고, 나아가 새로운 세기를 전망하기 위해 마련돼 지난 10월 11일부터 연재돼왔다.

독일의 관문인 프랑크푸르트 시내 중심의 카이저(황제)거리. 대문호 괴테의 고향 프랑크푸르트의 밤은 어둠 속에 핀 야화(夜花)들의 헤픈 웃음과 짙은 화장품 냄새로 가득했다.

성(性)은 매우 은밀한 것이지만 공개되면 곧 상품화된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거리였다. 주식시장에 정식으로 상장된 기업인 '베아테우제' 라는 성관련 용품점 체인은 기능을 짐작하기도 힘든 기물(奇物)들이 빼곡이 쌓여있는 섹스백화점. 포르노 비디오를 보는 영화관이 몇발짝 거리로 이어져있다.

눈요기만으로도 관음증을 충분히 만족시켜줄 만한 매춘빌딩. 홍등(紅燈) 또는 청등(靑燈)으로 침침하게 조명된 대형 빌딩은 호텔처럼 층층마다 긴 복도 양 옆으로 방들이 늘어서 있다.

그리고 방마다 반라의 매춘부들이 한명씩 앉아 복도쪽으로 유혹의 시선을 보낸다. 자기취향에 따라 방을 장식해두고, 문을 활짝 열고는 간혹 음악에 맞춰 혼자 춤을 추거나 몸을 비트는 포즈를 취하기도 한다. 아예 문밖으로 나와 복도를 지나는 사내들의 소매를 끌며 화대를 흥정하기도 한다. 이들은 사무실을 임대해 세금을 내면서 영업하는 개인사업가들이다.

성은 철저히 상품화됐고, '쾌락의 극대화' 라는 이데올로기가 밤거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더이상 성은 은밀하거나 부끄러운 금기가 아니었다.

세계적 통신사 AP와 AFP는 모두 20세기를 '성의 세기' 로 정의했다. 인류의 등장이전부터 시작된 성 문제는 20세기 들어 수천.수만년의 자기 역사를 뒤엎는 혁명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성혁명을 이끈 대사건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20세기가 시작되자마자 터져나왔다. 20세기 성혁명의 문을 연 사람은 오스트리아 정신의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는 1900년 '꿈의 해석' 이라는 책을 통해 인간의 성욕을 '감춰야할 부끄러운 본능' 에서 '생명을 지탱하는 건전한 힘' 으로 격상시켰다.

그리고 3년 뒤 독일에서 처음으로 나체촌이 등장했다. 성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부른 또다른 사건은 48년 발표된 킨제이 보고서. 미국인의 성생활 실태를 낱낱이 공개한 보고서는 은밀한 성이 모두의 것이고, 지극히 일상적임을 확인시켰다.

66년에는 성생활을 현미경으로 관찰한 마스터스와 존슨의 '인간의 성반응' 이란 책까지 출간됐다. 인식의 전환과 함께 생활의 혁명을 가져온 것은 20세기 과학.의학의 발전 덕분이다. 역시 20세기의 첫머리인 1909년 독일의 세균학자 파울 에를리히가 성병의 대명사였던 매독을 치료하는 살바르산을 개발했다.

매독보다 훨씬 무서운 성병으로 '천형' (天刑)이라고까지 불렸던 에이즈 바이러스도 90년대 중반 개발된 칵테일요법에 의해 불치병에서 난치병의 하나로 격하됐다.

20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자연의 기본법칙인 암수 구별마저 인간의 힘으로 뒤바뀌게 됐다. 52년 사상 최초의 성전환 수술이 미국에서 성공했다. 78년 영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시험관 아기 브라운 루이스는 성관계 없는 생명 탄생이라는 또다른 자연법칙의 파괴였다.

특히 여성의 성해방을 가능케 한 것은 원치않는 임신과 양육의 의무를 떨칠 수 있게 한 피임약의 개발이다. 60년 경구용 피임약 에노비드가 선보였고, 88년 먹는 낙태약 RU486이 프랑스에서 등장했다.

그리고 20세기의 끝머리는 98년 미국의 제약회사 파이저가 내놓은 발기부전 치료제 비아그라가 장식했다. 성해방의 마지막 걸림돌로 불리던 발기부전까지 첨단의학의 힘으로 극복된 셈이다.

이같은 20세기의 사건들이 혁명이라 불릴수 있는 것은 자연의 법칙인 성과 생식(生殖)을 분리, 성을 본연의 목적에서 벗어난 쾌락의 수단으로 탈바꿈시켰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발정기의 굴레를 벗어난 것은 농경의 정착으로 충분한 영양을 확보하게 된 선사시대였지만 완전한 탈바꿈은 현대의학이 위력을 발휘한 20세기에 들어서부터다. '성〓생식' 의 공식은 두가지 차원에서 무의미해졌다.

첫째, 성이 필요없는 생식이 가능해졌다. 시험관아기란 전통적 암수생식에서 자기와 똑같은 개체를 만들어내는 인간복제까지 다양한 기법이 선보였다.

둘째, 생식이 필요없는 성이 얼마든지 가능해졌다. 피임약이 보급되면서 출산조절이 가능해졌으며 원하지 않는 임신은 먹는 낙태약이란 간편한 수단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됐다. 생식 목적 이외의 성관계를 죄악시하던 톨스토이식 성관념은 우스개가 됐다.

터부의 파괴도 20세기 성혁명의 특징이다. 자위.동성애.오럴섹스 등 비정상, 심지어 정신병으로 간주돼온 성행위들이 금기의 족쇄에서 풀렸다. 이들 모두 사람마다 생김새가 다른 것처럼 생물학적 다양성의 하나로 용인되고 있다.

왼손잡이처럼 통계학적 다수에 속하지 않더라도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정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의학은 자위행위가 건강에 피해를 준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는다. 심지어 여성들의 불감증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자위를 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항문성교나 오럴섹스를 비롯한 비전형적인 성행위도 도착증이나 변태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아직도 미국에선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24개 주에서 부부간 오럴섹스도 남색행위로 규정해 처벌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법률상의 문제일 뿐 미국인 10명중 5명이 오럴섹스를, 1명이 항문 성교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상호 동의하에 이뤄지는 성행위에 대해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한 가능하면 관대해야한다는 것이 현대 성의학의 원칙이다.

20세기 성혁명에 일관되게 흐르는 이념은 성으로부터 최대한의 쾌락을 이끌어내자는 다수의 본능적 합의다.

이같은 추구는 다음 세기 보다 빨라질 과학.의학의 발전에 힘입어 함께 가속화될 것이다. 출산과 임신의 고통은 시험관아기나 복제인간 기술이 본격화되면서 인류의 생활에서 사라질 것이다. 쾌락으로서의 성은 가상현실을 통해 시간과 공간마저 초월, 가장 즐거운 오락.게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통신망을 통해 오감을 모두 주고받을 수 있는 보디슈트(옷)를 입고, 자신을 대신하는 가상의 인간을 원하는 섹스 파트너에게 보내 접속이 되면 마치 대화방에서 대화하듯 섹스방에서 성을 즐기게 될 것이다.

자신의 방안에 앉아 복제된 마릴린 먼로를 파트너로 삼을 수도 있게 됐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쾌락이 가능해지는 셈이다.

그러나 인간의 성이 쾌락 일변도로 치닫는 데 대한 새로운 도전과 제약 역시 끊임없이 제기될 것이다. 시험관아기나 복제인간을 둘러싼 윤리적 논란이 치열해질 것이며, 에이즈의 뒤를 이을 천형이 새로 등장할 수도 있다. 그리고 쾌락을 추구하는 인류는 이를 뛰어넘는 제2, 제3의 혁명을 도모할 것이다.

런던.파리.프랑크푸르트〓오병상 기자, 홍혜걸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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