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대표자의 책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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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당(唐) 태종(太宗)은 형인 태자 건성(建成)을 공격해 죽이고 아버지 고조(高祖)를 협박해 황제자리에 올랐다. 건성의 부하 중 위징(魏徵)은 평소 건성에게 세민(世民), 즉 태종의 야심을 경계하도록 권했었다. 건성이 누명을 쓰고 죽은 후 위징은 그 잔당(殘黨)으로 몰려 태종 앞에 끌려나왔다.

태종이 위징에게 "네가 왜 우리 형제를 이간시켰느냐" 하고 호통칠 때 모든 사람은 그가 죽임을 당할 줄 알았다. 그런데 위징은 당당히 "옛 태자께서 소신의 말씀을 들었다면 오늘의 화(禍)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태종은 그가 자기 소임에 충실했다고 칭찬하며 중용했다. 그후 위징은 죽을 때까지 바른 말 하는 신하로서 태종의 존중을 받았다.

유방(劉邦)이 팽성(彭城)에서 항우(項羽)에게 크게 패할 때 항우의 부하 정공(丁公)에게 포위당했다. 다급해진 유방이 정공에게 소리쳐 "우리 사이에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너무 심하게 굴지 맙시다" 하고 사정했다. 정공이 이를 딱하게 여겨 인정을 두었는지 유방은 겨?도망갈 수 있었다.

항우가 망하고 유방이 한(漢) 고조(高祖)가 된 뒤 정공이 유방을 찾아왔다. 팽성의 은혜를 생각해 좋은 대접을 할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고조는 정공을 당장 묶어 군중(軍中)에 조리돌린 다음 처형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정공은 제 임금 항우의 눈을 속여 사사로운 인정을 두었으니 이처럼 기군망상(欺君罔上)하는 자는 천하가 용납할 수 없다. "

당 태종인들 자신의 야심을 이루는 데 방해됐던 인물이 밉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한 고조라고 어려울 때 도움을 베푼 사람이 고맙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사람을 쓰고 버리는 데 자기 입맛을 앞세우지 않은 것은 나라 다스리는 일을 어렵게 여기고 조심했기 때문이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고 대통령은 그 대표자다. 이 나라 최고의 요직에 앉아서 주인과 대표자를 모두 속이며 국가기구를 사물화(私物化)한 자들이 속속 눈에 띈다.

조직의 의리니 인간적 의리니 변명이랍시고 하지만 이기심 하나를 분식하는 데 불과하니 뒷골목 깡패보다 나은 점이 무엇인가.

권력을 쥔 자들이 국민 속이는 짓이야 동서고금에 지천으로 있어 왔지만 '조직인' 을 자처한다면서 조직의 우두머리 대통령까지 속인다는 것은 정말 황당한 일이다.

속이는 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속는 사람도 문제가 있다. 국민의 대표자로서 대통령은 국민을 속이지 않음은 물론, 국민을 속이려는 자들에게 속아넘어가면 안될 책임을 가졌다.

그들을 요직에 임명하는 권한을 국민이 대통령에게 맡겨 놓았기 때문이다. 오만하기로 특출한 이름을 남긴 옛날 황제들도 나라 다스리는 일에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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