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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보다 메달 관심, 이대론 제2·제3 ‘김하나’ 힘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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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전국체전은 일제 치하이던 1920년 시작돼 국내 체육 발전과 엘리트 선수의 육성에 큰 몫을 담당해 왔다. 또한 대회를 유치하는 도시마다 도로를 정비하고 스타디움·체육관 등 스포츠 기반 시설을 확충함으로써 도시 리모델링의 계기도 됐다.

하지만 체전이 시·도 간의 과열 경쟁과 우수 선수 빼오기, 기록보다 순위에 집착하는 등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젠 체전도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마침 대한체육회가 박용성 회장 주도로 ‘체전 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움직임을 시작했다. 체전,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를 취재했다.

#세계선수권보다 중요한 체전

가장 큰 문제점은 체전이 ‘치열한 경쟁을 통한 기록과 경기력 향상’의 장이 아니라 점수와 순위에 집착한 ‘그들만의 게임’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체전은 종합 채점 방식으로 16개 시·도의 순위를 1등부터 16등까지 매긴다.

각 지방자치단체와 단체장은 종합순위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점수를 많이 받아 순위를 끌어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다. 기록 경쟁보다는 메달 경쟁에 매달리게 되는 구조다. 이번 체전 마라톤에서 고별 레이스를 뛰어 우승한 이봉주(39·충남) 선수가 “후배들이 순위에 집착해 누구도 앞으로 치고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탄한 것도 이 때문이다.

엘리트 선수들, 특히 비인기 종목 선수들에게 체전은 1년 중 최고 ‘대목’이다. 체전에서 금메달을 따면 1000만원 안팎의 성과급을 받고 이듬해 연봉도 꽤 오른다. 이 때문에 국제 무대에 과감히 도전하는 대신 체전이라는 ‘온실’ 속에 안주하려는 선수들이 많다. 지난달 대구국제육상대회 때는 남자 110m 허들의 이정준(25·안양시청)과 멀리·세단뛰기의 김덕현(24·광주광역시청) 등 국내 최고 선수들이 부상을 이유로 출전하지 않았다. 바로 뒤에 열린 이번 체전에서 김덕현은 금메달 2개, 이정준은 은메달 1개를 땄다. 대표선수들을 지도하는 외국인 육상 코치들은 ‘내셔널 게임(전국체전)’ 얘기만 들어도 진저리를 친다. 체전을 앞두고는 선수들이 ‘몸사리기’를 하면서 강훈련을 기피하기 때문이다.

‘철새 선수’도 문제다. 체전 일반부 출전 시·도는 ‘주소지’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소속 시·도를 옮겨 출전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우수 선수를 둘러싼 스카우트 경쟁과 잡음·민원이 끊이지 않는다.

체전의 지나친 비대화도 도마에 올랐다. 올해 체전은 41개 정식종목에 무려 576개 세부종목이 치러졌다. 선수단만 2만4541명이다. 그러다 보니 종목별로 시·도끼리 ‘나눠 먹기’를 하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군살 빼고 기록 중심으로 바꿔야

대한체육회는 올해 3월 ‘전국체전 운영개선 소위원회’를 구성했다. 소위는 월 1~2회 모임을 갖고 체전 개선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들이 제시한 방안은 ▶세부종목 축소를 통한 군살 빼기 ▶채점 제도 개선으로 순위보다 기록 향상 유도 ▶기준기록제 도입으로 기록 종목 출전기준 강화 등이다. 대한체육회 전국체전위원회 이기흥 위원장은 “정식종목 숫자는 줄이지 않되 세부종목의 경우 올림픽 종목은 출전 기준을 강화해 엘리트끼리 치열한 경쟁을 유도하고, 비올림픽 종목은 동호인에게도 문호를 개방해 축제 형식의 체전을 만들 생각”이라고 말했다.

육상경기연맹 황규훈 부회장은 “김하나를 보라. 포상금 제도를 ‘개인 최고 기록제’로 바꾸자마자 23년 묵은 기록을 2개나 깼다. 체전 채점제를 기록 중심으로 바꾸면 더 많은 김하나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 같은 개혁안에 대해 각 경기단체와 시·도 체육회가 반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체전 종목과 규모를 오히려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체육 활성화와 경기력 향상을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체전이 축소되면 소속 지도자 및 시·도 체육회 관계자들의 일자리가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시·도 체육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체육회가 체전 리모델링이 그래서 쉽지 않을 거라는 전망도 나온다.

체전의 순기능을 유지하면서 문제점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해준·최원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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