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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귀족’ 자부한 세계시민 에라스뮈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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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휴머니스트 중의 휴머니스트’ 에라스뮈스. 그는 휴머니즘을 유럽 전역에 걸친 평화 운동으로 승화시키고자 했다.

‘휴머니스트의 왕’으로 불리는 에라스뮈스(1466~1536)는 네덜란드에서 태어났지만 일생 유목민처럼 유럽 각국을 돌아다녔다. 동시대 학자들 중 가장 많은 여행을 했던 이 학자는 네덜란드·영국·이탈리아·독일·스위스 등지를 떠돌았다. 가장 인상 깊었던 나라는 1499년에 방문한 영국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토머스 모어, 존 콜레트 등의 휴머니스트들을 만났다. 교양과 학식이 풍부한 영국인들과 사귀면서 에라스뮈스는 깊은 감명을 받는다.

그러나 영국에 대한 이 모든 사랑도 그를 영국인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세계시민 에라스뮈스는 자유롭고 보편적인 삶을 떠날 수 없었다. 그에게 국가는 무의미했다. 그는 다만 교육과 정신의 귀족으로 이뤄진 상위 세계, 그리고 천박과 야만이라는 하위 세계, 이렇게 두 세계만을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정신의 귀족으로 스스로를 고집스럽게 제한한 에라스뮈스는 진정한 세계시민으로서 이곳저곳에 방문자로, 단지 손님으로만 남았다. 그가 평생 동안 사용한 언어는 모국어인 네덜란드어가 아닌 라틴어였다.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유럽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진영으로 양분돼 서로를 ‘사탄’이라고 비난하며 첨예하게 대립했다. 어느 것에도 구속받지 않으려 했던 자유사상가 에라스뮈스는 이렇듯 이념 갈등이 극단적으로 증폭되던 시기에는 설 자리가 없었다. 중립이 불가능했던 시대에 그의 명분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자유와 관용이 극단적 편 가르기보다 강한 추진력이 될 수 있다는 그의 믿음마저 실패한 것은 아니다.

유럽연합(EU)은 1987년부터 대학생들이 일정 기간 역내 타 국가의 원하는 대학에서 공부하고 학점을 받는 ‘에라스뮈스 프로그램’이란 학생 교류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에 ‘전 세계는 공동의 조국’이라고 선언했던 에라스뮈스의 이름이 붙여진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EU 25개국을 포함한 31개국 고등교육기관이 참여해 150만 명의 동문을 배출했다.

지난 10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한·중·일 3국 정상회담에서 일본의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는 한·중·일 현안 해소를 위한 대학생 교류를 제안했다. 이에 따라 한·중·일 3국은 ‘아시아판 에라스뮈스 프로그램’을 본격 추진하기로 했다. 편견 없는 자유사상가, 초국가적 세계주의의 최고 상징인 에라스뮈스의 정신이 동아시아의 평화·교류·통합에 기여하길 기대한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