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는 그를 믿고 찾아갑니다 그는 환자를 믿고 보살핍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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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약이다.’

을지대의대 외과 이태석 교수가 의사로서 갖고 있는 ‘신념 1조’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환자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의사가 환자를 믿는다? 언뜻 이상하게 들린다. 흔히 환자가 믿을 만한 의사를 찾는 게 통념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의 몸을 만지고 치료하는 게 의사란 직업입니다. 환자와 의사간에 상호 믿음이 있어야 좋은 치료 결과를 얻을 수 있어요.” 이런 신념이 있었기에 그는 미처 보호자와 연락이 닿지 않은 어린이 교통사고 환자를 부모의 수술동의서도 없는 상황에서 응급 수술을 감행했던 한 간 큰(?) 의사다. “환자가 대량 출혈로 쇼크에 빠져 사경을 헤매는 상황에서 보호자를 기다릴 시간이 있나요? 보호자가 나타나더라도 제 판단을 믿고 수긍할 거란 확신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 환자는 수술 결과가 좋아 생명을 건졌다.

의사 외의 직업은 생각한 적 없어

‘6·25 전쟁’ 때문에 의대를 중퇴했던 아버지의 소원은 장남(이태석)이 자신이 못다한 의사가 돼 병든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릴 때부터 의사를 천직으로 생각했고 한 번도 다른 직업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의대생이 된 후엔 의료봉사 동아리에 가입해 방학 때마다 빈민가 진료에 동행했다. “학생은 의료 봉사를 가도 선배 의사의 심부름을 하는 게 고작이에요. 하지만 이 경험을 통해 누구를 위해 어떻게 살아가는 의사가 돼야 할지를 깨닫게 됐습니다.”(이 교수)

소외계층 진료를 다니다 보면 가슴 아픈 사연이 많다. “팔 뼈가 부러졌는데도 나무를 부목으로 해 헝겊을 붕대로 활용한 채 한참을 지낸 환자가 있는가 하면 온갖 병이 겹쳐 도대체 무슨 병부터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막막한 느낌을 주는 분도 접하지요.”

그는 봉사활동의 가장 큰 장점으로 “자신의 한계점을 인식하고 겸손해지는 데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느끼게 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점”을 꼽는다.

“말이 봉사지, 일상에서 잊기 쉬운 겸손함과 감사의 마음을 유지시키니 치료 받는 환자보다 진료하는 의료진이 더 많은 걸 얻는 셈이에요.”(이 교수)

전문의가 된 그는 의료봉사 활동 범위를 넓히기 시작해 1992년엔 자신이 치료했던 환자의 어머니와 함께 가난한 선천성 기형 환자 치료를 돕는 ‘한울회’를 조직했다. 또 이듬해부터 매주 월요일 저녁마다 서울역으로 달려가 노숙자 진료도 시작했다.

이 교수는 한 달에 크고 작은 수술을 100건 정도 할 만큼 외과의사로서의 활동도 활발하다. 그는 성인 탈장 환자를 수술할 때 3차원 그물망을 국내 최초로 도입한 사람이기도 하다.

성인 탈장환자 첨단치료법 첫 도입

“2000년대 이후 노인 인구가 늘면서 탈장 환자가 급증하기 시작했어요. 복막이 약해지면서 장이 사타구니 부위를 통해 고환으로 빠져 나오면 병 자체를 부끄러워해 병원 오기를 꺼리는 분도 적지 않습니다.”(이 교수)

치료는 내려온 장을 배 속에 넣어준 뒤 구멍 난 부위를 그물망으로 덮어주는 방법인데 평면형 그물망을 사용할 땐 수술 후 재발률이 5%나 됐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4년 미국 마이애미대에서 최신 탈장 치료법을 배웠고, 귀국 후 구멍 난 부위를 앞뒤로 막아주는 3차원 그물망 치료법을 적용했다. 이후 재발률은 0.5% 이하로 줄었다. 이 교수의 치료를 받은 1000명 이상의 환자 중 재발한 경우는 한 명뿐이다.

의사를 천직으로 생각하는 이 교수는 “무릇 의사란 꺼져가는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해야 진짜 의사”라는 소신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는 생명이 오락가락 하는 환자가 찾는 내과·외과·소아과·산부인과 등 필수 진료과를 기피하고, 미용 시술에 관심이 쏠리는 요즘의 의료 현실이 안타깝다.

“왜곡된 의료 현실을 개선하려면 잘못된 의료 제도도 개선해야 하지만 의대생 시절, 인성 교육 과정도 강화해야 합니다. 또 사회 전반적인 물질만능주의도 바뀌어야 하고요. 그래야 의사와 환자가 서로 신뢰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좋은 치료 결과도 나옵니다.”

이태석 교수 프로필 

▶1957년 서울 출생

▶1983년: 경희대 의대 졸업

▶1983~1988년: 경희대 의대 수련의 및 외과

전공의, 외과전문의 취득

▶1991~1995년: 경희대 의대 전임의

▶1997년: 일본 오사카 시립아동병원 연수

▶1999년~현재: 을지대 의대 외과 교수

▶논문: SCI 논문인 ‘Vascular Surgery’에 실린 ‘고농도 포도당, 만니톨 및 PGE1 투여에 따른 배양내피 세포의 PDGF와 PGE2의 분비

변화에 관한 연구’ 외 77편


글=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사진=신인섭 기자



김희상 교수는 이래서 추천했다

“혼수 빠진 환자 돌보다 본인이 A형 간염 걸리기까지”

“병원 다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떠오르는 좋은 의사가 있지요. 의사들 역시 오랜 시간 병원 생활을 하면서 떠올리는 좋은 의사가 있습니다. 제겐 이태석 교수가 그래요. 만일 제가 병이 들면 이 교수 같은 주치의를 만나고 싶거든요.” 김희상(사진) 교수는 ‘의사인 내가 치료받고 싶은 의사’라는 말로 이 교수를 명의로 추천한 이유로 함축한다.

“제가 서울역의 노숙자 무료 봉사를 하게 된 계기도 이 교수 때문이에요. 그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환자가 있는 곳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상황만 허락되면 달려갑니다. 그러다 본인이 병 들어 입원한 적도 있어요.” 이 말을 마친 김 교수는 물 한 모금을 마시더니 말을 이어간다.

“7, 8년 전인가요? 한 번은 위중한 상태에서 수술을 받았던 환자가 간성 혼수에 빠져 이 교수가 근무하는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한 적이 있었어요. 물론 본인이 수술했던 환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진료하고 수술하는 바쁜 시간을 쪼개 밤낮 없이 그 환자를 돌봤어요. 그러다 급기야 본인의 얼굴이 노랗게 변할 정도로 황달이 심해졌습니다. 급성 A형 간염에 걸렸던 거예요. 마침내 이 교수 자신이 입원 환자가 됐는데 그때에도 다른 의료진을 통해 환자 상태를 늘 체크하더라고요. 그래서인지 다행히 그 환자는 상태가 좋아져 퇴원했습니다. 병 들면 정말로 이런 의사에게 치료받고 싶지 않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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