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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법 개정 시안' 찬반 엇갈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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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국립국어연구원(원장 심재기)이 17일 발표한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개정 시안' 의 19일 공청회를 앞두고 찬반 논쟁이 불붙고 있다. 찬성 쪽은 컴퓨터 자판에도 없는 반달표(˘)를 폐기하는 등 정보화 시대에 걸맞는 개선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반대 쪽은 "15년간 써오며 뿌리내린 표기법을 뜯어고쳐 혼란과 경제적 부담을 초래할 이유가 무엇이냐" 고 주장하고 있다.

◇ 개정찬성〓국어연구원측은 컴퓨터가 일상화된 새 시대에 맞는 로마자 표기법 마련과 외국인이 어떤 한국어 단어를 발음할 때 우리의 귀에 들리는 '음성인식' 이 더 중요하다는 의견이다. 기존 표기법은 외국인의 귀에 들리는 음성인식 위주로 되어있다.

실제로 '춘천' 을 나타내는 기존 로마자 표기법 'Ch'unch□n' 에 사용된 어깨점(')과 반달표(˘)는 컴퓨터 자판에도 없어 문서작성시에는 생략되기 일쑤였으며 '부산' '광주' 를 나타내는 'Pusan' 'Kwangju' 는 실제 우리 귀에는 '푸산' '쾅주' 로 들려 비현실적이란 지적을 받아왔다.

기존 표기법은 서양인의 인식에 맞춰 만들어진 매큔 라이샤워 표기법에 바탕을 둔 것이므로 한국인에게는 어색하게 들릴 수 있다.

국어연구원이 성명과 회사명 등을 제외하고는 예외없이 'Pusan' 을 'Busan' 으로, 'Kwangju' 를 'Gwangju' 로, 'Taegu' 를 'Daegu' 등으로 바꾼 것은 로마자 표기법을 '서양인 중심' 에서 '한국인 중심' 으로 바꾸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국어연구원의 정희원 연구사는 "기존 표기법이 실제 외국인의 한국어 발음에 더 가깝긴 하지만 우리 귀에는 'Pusan' 을 'Busan' 이라고 유성음 발음을 내는게 더 알아듣기 쉽다" 고 말했다.

한국외대 황종인교수(독어학)는 "현행 표기법을 개정하지 말자는 주장은 마치 로마자 표기법이 외국 관광객들을 위한 도로표지판에나 사용되는 정도에 그친다는 인식때문인 것 같다" 며 "우리 여권 이름에도 로마자 표기가 들어가며 세계의 수많은 데이타베이스에도 로마자로 표기된 한국어 자료가 들어가 있는만큼 우리의 음성인식을 존중하는 쪽으로 개정할 필요가 있다" 고 말했다.

◇ 개정반대〓고려대 서지문 교수(영문학)는 "국어의 로마자 표기는 한국이 서양과 문물교류를 하는데 있어서 정확하게 의사와 정보를 소통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점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고 강조한다.

우리말 'ㄱ, ㄷ, ㅂ' 을 나타내는 서양인들의 실제 발음이 'g, d,b' 보다 'k, t,p' 쪽에 훨씬 가까운데 굳이 '한국인 중심' 의 표기체계로 바꾼다면 한국행 비행기와 선박은 하늘이나 바다에서 방황하게 될 것이고, 승객들은 공항과 항구에서 미아가 되고 짐들은 행방불명될 우려가 있다고까지 말한다.

서교수를 비롯한 개정반대여론은 수천억원을 들여 전국의 도로표지판을 모두 고쳐야 할 경제적 부담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건설교통부는 97년 1월부터 4천여억원의 예산으로 전국 10만여개 도로표지판 교체작업을 해왔는데 로마자 표기법 개정이 확정되면 그동안의 작업이 무효화돼 예산낭비를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정책연구센터 김휴종 박사는 "경제적 측면만 고려할 경우 '메뉴 코스트' 가 엄청나게 드는 것과 마찬가지" 라며 경제적 부담을 우려했다.

식당에서 음식 값을 1센트 올리는 것은 쉽게 보일지 몰라도 메뉴를 바꾸는데 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 기업의 경우 새로운 로마자 표기법에 따라 각종 영문자료, 명함 등을 바꾸는 부담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서울대 이상억 교수(국문과)는 사용자 위주로 복수의 로마자 표기법을 인정하자고 주장한다. 도로표지판.도서관목록.여권.영어논문 등에 있어서는 로마자 표기가 외국인에게 한국어 발음을 유사하게 하도록 도와주는 기능이 중요한만큼 기존의 표기법이 개정안보다 제구실을 할 것이라는 의견이다.

대신 한국인이 언어자료를 전산처리할 경우 등을 위해 추가로 개정안을 만드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주장이다.

김국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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