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원더걸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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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호 02면

까까머리 중학생은 주말이면 친구들과 영등포로터리의 음반점을 찾곤 했습니다. 가끔 듣고 싶은 노래를 적어 주인 아저씨에게 주고 ‘나만의 카세트 앨범’을 만들 때도 있었지만, 주목적은 ‘MBC FM 박원웅의 팝스팝스’를 얻기 위해서였죠. 외국 가수들의 소식과 팝송 악보, 빌보드차트까지 실려 있던 이 A4 두 장짜리 정보지, 혹시 기억하시나요. 그때 빌보드차트를 보면서 “올리비아 뉴튼 존이 몇 등 올라갔네”

“퀸 신곡 들어봤니”하면서 친구들과 수다 떨던 기억이 새롭네요.

그러다 고등학생이 되니 국내에도 ‘빌보드차트’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고3시절, 첫 월말고사가 끝나고 교실 뒤쪽 게시판에 붙은 큼직한 종이. 전교 100등까지 이름과 석차와 과목별 점수가 낱낱이 적힌 이 누런 시험지에 담임선생님은 친절하게도 우리 반 친구들 이름에는 빨간 사인펜으로 테두리를 둘러주시곤 했죠. 아이들은 이를 ‘빌보드차트’라고 불렀습니다. 차트에 못 오른 아이들은 창피해서, 오른 아이들은 오르락내리락 변하는 순위에 예민해져 애써 외면하던 공포의 누런 종이.

그런데 원더걸스(사진)는 이 차트가 무섭지 않나 봅니다. 10월 셋째 주 미국 빌보드 싱글 차트 ‘Hot 100’에 ‘노바디’가 76위! 1894년 시작된 빌보드차트 115년 역사상 아시아 가수로는 네 번째 진입입니다. 그전에는 규사카 모도(1963), 핑크 레이디(79), 옐로 멍키 오케스트라(80) 등 일본 가수뿐이었죠. 물론 국내 가수로도 처음이고요.

방송횟수, 음반판매, 디지털 다운로드를 합산해 산정되는 순위에 언어와 문화가 다른 아시아 가수가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는 것은, 빌보드 ‘핫 100’ 명성이 예전 같지 않다는 지적이 있음에도, 적지 않은 의미가 있습니다. 길거리 사인회와 전미투어 콘서트 참가 등 초심으로 돌아간 멤버들의 노력과 청소년 의류 매장에서 CD를 판매하는 역발상 마케팅 전략이 통했다는 것이죠. 이 ‘놀라운 소녀들’이 사람들을 얼마나 더 놀라게 할지 어디 두고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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