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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를 넘어] 15. 서브컬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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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중앙일보가 밀레니엄 기획의 일환으로 경남대(총장 박재규)와 공동으로 엮는 '세기를 넘어' 시리즈의 열다섯번째 주제는 '서브컬처' (subculture)다.

'하위문화' 로 번역되는 서브컬처는 대부분의 주체가 젊은이라는 점에서 60~70년대에 유행한 '청년문화' 와 비슷하지만 그보다 폭넓고 분석적인 개념이다.

서브컬처들은 현대 사회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두루 반영하기 때문에, 20세기의 삶을 재고 다음 세기를 가늠하는 데 요긴한 잣대다.

그 본질은 기성 질서와 권력에 대한 도전이다. 기성 질서와 문화에, 권력과 계급에, 생산성 지상주의에, 백인과 남성과 이성애(異性愛)에 맞서 그들은 때로는 따로, 때로는 얽혀서 발언하고 행동한다. 혹은 맞섬을 포기하고 돌아선다.

비트족.모드족.히피족.펑크족이 보여주듯 이런 저항에선 흔히 '스타일' 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서브컬처의 궤적을 따라가 보자.

한여름의 베를린 중심가는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의 물결에 휩쓸렸다. 에른스트 로이터 광장에서 브란덴부르크 문까지 4㎞에 이르는 거리를 각양각색의 젊은이들이 점령했다.

'러브 퍼레이드 99' . 참가자가 1백50만명을 넘는다고 했다. 모두 테크노 음악 애호가들로, 닥터 모테.톰 노비.폴 반 다이크.웨스트밤 등 유명 뮤지션과 DJ들이 펼치는 테크노 향연을 즐기기 위해 이날 하루 모인 것이다.

참가자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인이 탄 트럭을 따라, 거대한 스피커가 퍼부어 대는 전자음의 비트에 몸을 맡긴 채 거리를 행진했다.

꼭 10년 전에 1백50여명의 젊은이와 함께 러브 퍼레이드를 처음 조직했던 인기 DJ 닥터 모테는 개회사에서 "음악은 경계를 없애고 모든 문화와 인종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이 땅의 평화" 라는 연설로 분위기를 띄웠다.

오후 7시에 공식행사를 마친 참가자들은 시내에 산재한 수백개의 테크노 바와 클럽.디스코텍.광장 등으로 흩어져 밤새 베를린의 '해방공간' 을 만끽했다.

기존의 어떤 음악과도 섞일 수 있고, 심지어 기계음이나 소음과도 결합할 수 있다는 테크노 특유의 '경계 허물기' 는 이날 국가와 인종, 계급과 성(性)의 구분을 무너뜨리면서 각국의 젊은이들을 하나로 묶어 냈다. 이보다 두 주일 앞서 같은 장소에서 '게이 퍼레이드' 가 열렸다.

1969년 뉴욕의 스톤 월이라는 게이 바를 경찰이 급습해 동성애자들을 구타하자 동성애자 5천여명이 시위한 것을 기념해 매년 열리는 행사였다. 30여대의 트럭을 뒤쫓아 게이들과 레스비언들은 테크노 음악에 맞춰 춤추며 거리를 행진하면서 자신들의 성적 정체성을 당당히 과시했다.

주류(主流)문화를 거스른다는 의미를 지닌 서브컬처(하위문화)는 원래 특정 세대나 범주에만 적용하는 개념은 아니지만, 흔히 50년대 이후의 '청년층 하위문화' 와 같은 말로 쓰인다.

비트-히피-펑크족 등으로 시대에 따라 외연과 내포와 스타일이 바뀌면서도 청년 하위문화가 결코 놓지 않았던 정신은 '사회의 주변에 있는 소수에 의한, 소수를 위한 문화' 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단한 바윗덩어리 같은 주류 질서에 구멍을 내고 균열을 일으키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했다.

백인에 대해 흑인이, 이성애자들에 대해 동성애자가, 남성중심 사회에 대해 여성들의 권리가 옹호되는 것은 당연했다.

서브컬처의 촉매는 대중예술이다. 그중에서도 음악, 특히 록(처음엔 로큰롤)이다. 따라서 서브컬처의 변천은 록의 사회사와 상당 부분 겹친다.

50년대에 엘비스 프레슬리는 미국에서 '10대의 반란' 을 주동했다. 허리와 엉덩이를 흔들고 다리를 떨어대는 숨가쁜 율동에 젊은이들은 넋을 잃었다.

그가 56년에 내놓은 싱글 '하트브레이크 호텔(상심의 호텔)' 은 당시로선 기록적인 1백50만장이 팔려 나갔다. "난 너무 외로워 죽을 지경이야" 라는 가사는 어른들의 세상이던 아이젠하워 시대의 10대들이 지겨움과 소외감을 한꺼번에 날려 버리게 해준 뇌관이었다.

여기에 영화 '이유없는 반항' 에서 제임스 딘이 보여준 거칠고 반항적인 이미지가 겹치면서 청소년들은 가정과 부모의 품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프레슬리와 딘 이전엔 청년기란 단지 성인이 되기 위해 준비하는 '이행기' 에 불과했다. 기성세대에 편입되는 데 필요한 교양과 질서의식을 습득하는, 아니 세뇌받는 준비기였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독자적인 문화, 반항하는 문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실 '청년문화' 가 50년대에 불쑥 솟아난 현상은 아니었다. 재즈의 시대로 불린 1920년대에도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는 '또래 문화' 가 형성되고 있었다.

유행을 따라 옷을 바꿔 입고 진한 화장을 하는 이들이 늘었다. 가정으로부터 독립하는 젊은이에 대한 기사가 심심찮게 신문에 실렸다.

하지만 이 시기의 청년문화는 세대간의 적대감으로까지 발전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경제 질서와 정당체계, 부르주아적인 가정의 가치를 포기할 만큼 청년운동이 급진 노선을 걷게 된 데는 노동자 계급 출신들이 대학에 대거 들어간 것과도 관련이 있다.

여기에 베트남 전쟁이 정치적 행동주의에 기름을 부었다. 피임약의 보급은 젊은 여성들로 하여금 성(性)에 자신감을 갖도록 해 프리 섹스를 통한 성 해방운동에 불씨가 됐다.

청년 하위문화는 복장과 제스처를 통한 '스타일의 문화' 라고 할 수도 있다. 여기엔 TV의 급속한 보급도 한몫 했다. 시각에 민감한 세대가 탄생한 것이다(엘비스 프레슬리는 최초의 TV 스타였다). 기름 바른 머리를 뒤로 넘기고 가죽 재킷과 부츠 차림으로 오토바이를 모는 로커족, 깔끔한 프록 코트에 좁은 넥타이를 매고 스쿠터를 즐겨 타는 모드족 등이 50년대와 60년대에 영국을 누볐다.

미국에선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후줄근한 코트를 걸치고 낡은 청바지와 샌들을 신고 다니는 비트족이 50년대 청년문화를 주도했다.

60년대엔 히피족이 마약과 환각제를 상용하면서 공동체 생활과 자유로운 성애, 자아의 확대를 추구했다. 이에 반해 쇼비니즘적인 성향을 지닌 스킨헤드족은 머리를 짧게 깎고 멜빵 달린 작업복 바지에 징 박은 부츠 차림으로 히피들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처럼 다양한 '족(族)' 의 출몰은 청년 하위문화가 스타일을 통한 '상징적인 도전' 이기도 함을 보여준다.

64년 세계를 휩쓴 비틀스를 통해 청년문화는 영.미권을 넘어 다른 대륙으로 번져갔다. 그러나 70년의 비틀스 해체가 상징하듯 그 이후 청년문화는 활기와 역동성을 잃어갔다. 저항문화를 상징한다고 믿었던 록은 거대 음악산업에 포섭돼 버렸다.

이에 대한 대항으로 독립 레이블과 펑크 등이 등장하지만 결국 비슷한 길을 걷게 된다. 레이건과 대처가 집권한 80년대는 정치적인 보수주의와 신애국주의의 파도 속에서 청년문화도 완전히 쇠잔한 듯해 보였다.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의 팝은 록이 가졌던 저돌성과 저항성을 담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록은 특유의 '부정 정신' 을 회복했다. 니르바나.펄 잼 등 미국 시애틀 출신의 밴드들은 상업성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록의 본령' 으로 돌아가겠다고 천명하면서 올터너티브 록을 선도했다. 흑인들의 힙합과 갱스터 랩도 대안적인 록으로 각광받고 있다.

니르바나의 멤버인 커트 코베인은 94년 "내가 1백% 즐기는 듯이 음악을 하면서 관객 모두로부터 돈을 뜯어내는 것은 최악의 범죄" 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늘 자본의 유혹이 따라다니는 록 음악처럼 청년 하위문화는 상업주의의 포화에 쉽게 무너지는 경향을 보인다.

자본은 누구든 무엇이든 교환가치와 이윤의 원천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게이 퍼레이드' 와 '러브 퍼레이드' 의 경험은 청년들 사이의 순수한 연대감이야말로 하위문화가 상업주의로 퇴행하는 것을 막는 유일한 방부제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지난기사 목차

1.파시즘(10월 11일)

2.레닌주의(10월 18일)

3.제국주의(10월 19일)

4.중국 문화대혁명 (10월 20일)

5.해방신학(10월 25일)

6.실존주의(10월 26일)

7.68학생운동(10월 29일)

8.종속이론(11월 1일)

9.동유럽 민족주의 (11월 2일)

10.게릴라(11월 4일)

11.환경운동(11월 8일)

12.구조주의.탈구조주의 (11월 10일)

13.케인스경제학(11월 11일)

14.소비의 사회(11월 15일)

베를린.런던〓김창호.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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