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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노병 얼 폭스 80세 은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나는 공직을 떠나지만 오늘날의 미군과 노르망디의 전사들을 잇는 마지막 가교(架橋)로서 기억되길 바랍니다. "

만 80세의 2차 세계대전 참전 마지막 현역이 은퇴한다. 얼 폭스 미 해안경비대 군의관.

"나이가 문제가 되나요. 동료들은 나보고 65세라고 하던 대요. " 희끗희끗한 백발이지만 건강미가 넘쳐흐르는 폭스는 "경비대에는 증손자뻘 되는 동료도 많다" 고 익살을 부리며 19일에 있을 전역식을 못내 아쉬워 한다.

미군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던 일본의 진주만공습(1941년 12월 7일) 이듬해 진주만에 투입돼 5년간 어뢰정 함대 요원으로 전선을 누비면서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에서나 나옴직한 '포로구출작전에도 참가했던 그의 무용담은 이제 추억의 한 페이지가 됐다.

그러나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 이라는 명언은 비단 맥아더 장군에게 국한된 말은 아니다.

폭스는 1919년 1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직후 버지니아주 피터즈버그에서 태어났다. 7세 되던 해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사망, 백화점 점원이었던 어머니의 뒷바라지로 성장했다.

당초 꿈은 의사가 되는 것. 그러나 리치먼드대에서 생물학을 공부한 뒤 해군장교였던 아버지의 뒤를 잇고자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간다.

생도시절인 1941년 겨울 진주만 폭격이 감행되고 그로부터 몇달 뒤 그는 진주만으로 급파돼 한 어뢰정 함대에 배속됐다. 임무는 일본군함 격침.

"우리 함대는 정말 재빨랐지요. 물속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며 적 함대를 향해 어뢰를 '팡, 팡' 쏘아대고…. " '어뢰를 발사하듯 책상을 탁 치면서 '그는 신이 나며 말을 이었다.

그에게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 때인 1943년 구사일생의 작전을 경험한 기억이 있다. 부여된 임무는 '알래스카 키스카섬에 포로로 잡힌 캐나다 군인을 구출하라. ' 그 캐나다 군인은 일본함대 이동을 파악, 암호 메시지를 연합군에 보내는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이를 알아챈 일본군에 붙잡혔다.

폭스는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섬에 쉽게 침투, 캐나다 군인을 빼내오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던가. 타고 있던 어뢰정이 암초에 부딪혀 박살난 것이 아닌가.

구조대원들은 황급히 2대의 구명보트에 나눠 타고 탈출을 재개했다. 베링해를 조심스럽게 빠져나올 무렵 섬에 있던 일본군 초소에 비상 사이렌이 울려퍼지더니 일본군의 추격이 시작됐다.

총알도 빗발쳤다. "이젠 죽었구나." 폭스는 당시의 아찔했던 순간을 회상하며 눈을 감았다. 구출작전이 개시된 지 하루가 훨씬 지났을까. 이때 대원들은 "펏, 펏, 펏" 하는 엔진소리를 들었다. 지원 나온 미 해안경비대원들의 보트엔진 소리였다.

"안개가 자욱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일본군의 사격은 정확치 않았고, 희미하게 보인 해안경비대 보트를 본 순간 직감적으로 '살았구나' 라고 느낄 수 있었죠. " ' 성공적인 포로 구출작전으로 폭스는 은성(銀星)무공훈장을 받았다.

5년간의 군복무 후 1947년 제대, 다시 의학을 공부한 그는 고향에서 당초의 꿈이었던 외과의사의 길로 새 삶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타고 즐긴 것은 이번엔 어뢰정이 아닌 레저용 요트였다.

하지만 군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74년 어느날 플로리다 앞바다 요트 위에서 따사로운 햇볕을 만끽할 무렵 갑작스런 사건을 보게 된다.

한 남자가 요트 위에서 심장발작을 일으킨 것. 그는 비상조치로 그를 살려냈고, 해안경비대장은 그의 경력을 알아낸 뒤 감언이설로 그를 꼬드겨 군문(軍門)에 다시 들어오길 부탁한다.

그는 조국을 위한 마지막 봉사라 생각하고 경비대장의 청을 수락, 해안경비대 군의관으로서 25년 동안 다시 군복무를 하게 됐다. 그의 나이 55세 때의 결정이었다.

여생을 부인과 지내기 위해 은퇴한다는 그는 "한 세대가 기초를 닦으면 다음 세대는 이 반석 위에 반듯한 건물을 짓는 일, 이러한 명예와 희생정신이 오늘날 조국을 일궈낸 조각들이 아닌가" 라고 반문하면서 자신이 평생 몸담아온 노을진 바다를 향해 거수경례를 했다.

정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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