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선을 없애는 세계, 선에 발 묶인 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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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 구글 본사의 자유분방한 분위기. 직원이 음악을 들으면서 두 대의 모니터로 작업하고 있다. [구글 제공]

지난달 17일 미국 실리콘밸리의 구글 본사. ‘인터넷 아버지’로 불리는 빈트 서프 부사장은 기자와 함께 건물 로비를 지나면서 큼지막한 지구본과 실물 크기의 우주선 모형을 가리켰다. “이제 언어가 달라도 상관없습니다. 인류를 하나로 묶고 우주까지 연결되는 ‘뉴(New) 인터넷 월드’를 건설할 겁니다.”

지난달 초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노키아월드’라는 국제행사 현장. 노키아는 단말기 제조 사에서 무선 인터넷 회사로 변신하겠다고 선언했다. 올리 페카 칼라스부오 CEO 는 “회사의 기존 유전인자(DNA)를 바꿔서라도 미래 사이버 세상의 주역이 되겠다”고 의욕을 보였다.

25일은 인터넷의 시원(始原)인 ‘아르파넷(ARPANET)’이 탄생한 지 꼭 40년 되는 날이다. 장년의 인터넷은 이제 현실의 정치·경제·사회·문화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세상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됐다. 지난 40년이 선(線)에 묶인 인터넷 세상이었다면 향후 40년은 전파를 통해 지구촌 어디나 누구와도 소통하는 무선(Wireless) 사이버의 시대가 될 것이다. 서프 박사는 이를 가리켜 ‘인비저블(Invisible) 인터넷’이란 표현을 썼다. 인프라가 눈에 보이진 않지만, 언제나 갖고 다니며 쓸 수 있다는 뜻이다.

돈과 권력을 만들어 낼 이런 신천지를 놓고 인터넷 열강들의 경쟁이 뜨거워지고 있다. 세계 최대 인터넷 회사인 구글은 해가 지지 않는 인터넷 왕국을 건설하려 한다. 핀란드의 세계 최대 휴대전화기 회사인 노키아는 이제 무선 인터넷의 절대강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구글은 이달 초 자체 모바일 운영체제(OS)인 ‘안드로이드’를 탑재한 스마트폰을 미 버라이즌을 통해 공급하기로 하면서 마이크로소프트의 아성에 드디어 포문을 열었다. 에릭 슈미트 CEO는 “버라이즌과의 제휴는 시작일 뿐”이라고 말했다.

구글·노키아 등 정보기술(IT)의 거인들을 접촉하면서 ‘인터넷 강국’을 자부해 온 한국의 현실이 머릿속에 겹쳐졌다. 차세대 사이버 인프라로 꼽히는 무선 인터넷 분야에서 후진국으로 전락한 우리나라의 모습 말이다. 가장 큰 실책은 통신업계가 눈앞의 달콤한 음성통화 수익에 매달려 다가오는 무선 데이터 시장을 소홀히 한 점이 꼽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30개 회원국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2008년 기준), 국내 이통 3사의 데이터 매출 비중은 17%로 전체 평균 25%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인터넷 후진국이라고 우습게 봤던 일본이 1위(41%)에 올랐다.


무선 인터넷의 득세는 도도한 흐름이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2012년 세계 인터넷 접속의 절반 이상은 모바일 상태에서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세계 휴대전화기 시장도 무선 인터넷이 되는 고성능 스마트폰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올해만 해도 그 비중이 18%에 이를 전망이다. 한국은 1%대에 머무를 것이라는 우울한 소식이다. 임주환 한국디지털케이블연구원장은 “정부나 통신업계 모두 유선 인터넷의 성공에 취해 개척 정신이 약해 졌다”고 지적했다. 이어 “요금을 높게 책정하고, 서비스 환경을 폐쇄적으로 운영해 스스로 ‘갈라파고스 섬’에 가둠으로써 세계 트렌드에서 뒤지게 됐다”고 비판했다.

다행스러운 건 KT를 필두로 SK텔레콤과 LG텔레콤이 이달부터 유·무선 융합 인터넷 서비스를 속속 선보이는 점이다. 이석채 KT 회장은 “실내에선 유선 인터넷, 밖에선 무선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FMC·FMS 같은 서비스는 가정·기업의 소통 기반을 유·무선 융합 인터넷 위주로 바꿀 것”으로 기대했다.

특별취재팀=이원호(미국)·김창우(독일)·심재우·김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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